출간소식

서재 2019. 12. 20. 21:53

출간 소식을 정리합니다.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김보영, 박상준, 심완선 지음, 돌베개 펴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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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바야흐로 SF의 시대가 찾아왔다. 이제 SF는 더 이상 공상 과학이 아닌 가장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문학이자 장르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저 광대한 SF의 네트 속으로 떠나려는 한국의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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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글이 돌베개에서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김보영, 박상준님 사이에 낑겨들어갔습니다.

 

 

[SF는 정말 끝내주는데]

심완선 지음, 에이플랫 펴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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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SF는 정말 끝내주는데 - A♭시리즈 012

SF를 위시한 다양한 장르소설 및 작가에 관해 〈미래경〉 〈환상문학웹진 거울〉 〈판타스틱〉 〈프레시안 북스〉 〈아이즈〉 〈에피〉 〈한국일보〉 등에 글을 게재해 온 SF 칼럼니스트 심완선의 첫 단독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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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입니다. 알라딘에 먼저 등록되었고 다른 인터넷 서점에도 일괄 등록 예정입니다.

주석 관련 오류가 있었습니다.

 

 

[취미가 vol.1]

강상준 외 지음, 에이플랫 펴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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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취미가 vol.1 - A♭시리즈 010

당신의 취미를 수집합니다.br/br/A보다 반음 낮은 곳에 숨어 있는 대중문화의 모든 것, ‘에이플랫 시리즈’의 열 번째 책.br/br/취미가 vol.1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저자들의 취미를 엮어낸 책으로, 평론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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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입니다. '페미니즘 SF'에 대한 글을 수록했습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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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의 연재 기획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 출간으로 인하여 삭제합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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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의 연재 기획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에 실렸던 글입니다.

+ 출간으로 인하여 삭제합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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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SF 작가와 사회 변화를 엮어서 살펴보는 연재 기사에 글을 썼습니다.

처음 기고한 44편은 조지 R. R. 마틴으로,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게재분입니다.


+ 출간으로 인하여 삭제합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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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7년 7월에 출간된 3권짜리 『할란 엘리슨 걸작선』(이수현, 신해경 옮김, 아작 펴냄)에 실린 해설입니다. 『제프티는 다섯 살』,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 수록작을 한번에 소개하는 글이고, 3권 모두에 동일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소개글로도 공개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단편선이 출간되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작가이기 때문에 해설을 쓰게 되어 기뻤습니다. "신이시여, 할란 엘리슨이네"가 여기저기 보여서 즐거웠어요.



용암과 메스를 갖춘 독설가, 할란 엘리슨


0. 신이시여, 할란 엘리슨이네


 할란 엘리슨의 휘황찬란한 수상 이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작품집이 소개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성질머리 때문에 저작권 계약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탓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그런 뜬소문에 신빙성을 더할 만큼 할란 엘리슨은 미국 장르소설가들 사이에서 매우 악명이 높다. 그는 40년 동안 SF, 호러, 판타지 장르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사석에서는 종종 “저 빌어먹을 할란”, “신이시여, 할란 엘리슨이네”, “너 그 말 할란 엘리슨이 못 듣게 해”라는 말이 따라다닌 인물이다. 그가 술집에서 당구를 치다가 프랭크 시나트라와 주먹을 주고받았다든가, 월트 디즈니에 출근한 첫날에 부적절한 농담으로 해고됐다든가, 자기 글을 폄하한 교수를 때려서 입학한 지 18개월 만에 대학에서 퇴출당했다든가(엘리슨은 이후 40년 동안 자신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그 교수에게 복사본을 한 부씩 보냈다고도 한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자기 아이디어를 베꼈다고 생각한 영화 제작사들을 상대로 지독한 저작권 소송을 벌였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할란 엘리슨의 악명이 드높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1955년 데뷔한 이래 작품을 쏟아내며 1,700여 편의 글을 썼고, 114권의 책을 쓰거나 편집했고, 12편의 시나리오를 냈다. 그의 이력은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중·단편과 함께 TV쇼 각본, 시나리오, 코믹북 스토리, 에세이, 미디어 비평을 두루 포함한다. 엘리슨의 휴고상, 네뷸러상, 에드거상, 브람스토커상, 로커스상 등의 수상 기록은 20세기를 통틀어 최고봉에 속한다. 젊은 엘리슨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는 오 헨리의 <동방 박사의 선물>이나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와 함께 영어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이야기 10위에 들어가고, 그가 각본을 쓴 <스타 트렉> ‘영원의 경계에 선 도시(The City on the Edge of Forever)’ 에피소드는 시리즈 79편 중 최고로 꼽힌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엘리슨을 두고 “그는 자기 키가 159센티미터라고 하지만, 재능과 열정과 용기 면에서는 2미터가 넘는 거인”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엘리슨의 대표 걸작선으로, 2014년 출간된 《화산의 꼭대기(Top of the Volcano): 할란 엘리슨 수상집》을 주제에 따라 세 권으로 나누어 옮긴 것이다. 작품의 해설은 작가 소개에 맞추어 연대기별로 정리했다.


1. 미국 뉴웨이브의 전성기를 이끌다


 할란 엘리슨은 로저 젤라즈니, 새뮤얼 딜레이니와 더불어 가장 스타일리시한 뉴웨이브 작가로 평가된다. 뉴웨이브는 60, 70년대에 주류를 이룬 SF의 하위 사조로, 과학기술적인 측면보다 인간 내면의 심층 세계를 중시하고 전위적인 실험으로 문학성을 추구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도 엘리슨은 용암처럼 강렬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미국 뉴웨이브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엘리슨의 초기 대표작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1965)는 문장을 완성하기보다 단발적으로 끝맺으며 독자를 다음으로 이끄는데, 이는 시각 효과와 서스펜스를 극적으로 활용한 A. E. 밴 보트식 작법론의 모범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엘리슨의 현란한 서술과 심리 묘사는 뉴웨이브의 시초이자 “불꽃놀이” 같은 문체라고 일컬어졌던 앨프리드 베스터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특히 <사이 영역>(1969)은 어지럽게 붕괴하는 활자 배치와 이미지로 시각적인 충격을 시도하면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나 《타이거! 타이거!》에서와 같은 문학적 실험을 엘리슨이 어떻게 계승했는지 시사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엘리슨은 앨프리드 베스터의 《컴퓨터 커넥션》의 추천사를 통해 죽은 작가에게 바치는 경탄과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짐승>(1968)은 지극히 암시적인 글이다. 엘리슨은 여기서 오래된 상징체계를 차용해 SF의 방식으로 신화를 구현한다. ‘머리 일곱 달린 용’은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짐승이고 ‘열자마자 내용물이 흩어지는 상자’는 판도라의 상자다. 엘리슨은 신화가 그렇듯 ‘배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변천’이 무엇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고 독자가 알아서 이해할 영역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신화와 달리 작중의 주역은 기술과 인간이며, 우주의 이쪽과 저쪽을 인과적으로 연결해 아득하고 아연한 암시를 남기는 모습은 더없이 SF답다. 이는 엄밀한 과학적 서술에 치중하는 하드 SF가 각광받기 전에 “소프트”한 뉴웨이브가 어떻게 명성을 떨쳤는지를 증명한다.


 국내에도 일찍이 소개된 적 있는 <소년과 개>(1969)는 디스토피아와 서부 활극을 합친 비뚜름한 중편으로, 예상을 뒤집는 결말은 인간의 증오와 사랑이 주된 테마라는 엘리슨의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인간이라는 내우주(內宇宙)에 치중하는 경향은 <랑게르한스 섬 표류기: 북위 38˚ 54´ 서경 77˚ 00´ 13″에서>(1974)에 이르면 한층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발전한다. 이 단편은 문자 그대로 주인공 속으로 들어가며, 영화 <울프맨>의 비극을 괴물과의 싸움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내면세계 여행으로 마무리한다.


2. 메스와 소실점


 한편 기괴한 이야기를 그릴 때 엘리슨은 문학의 메스를 들고 인간의 터부를 헤집곤 한다. 한 줌의 희망도 없는 닫힌 세계를 헤매는 사람들, 스멀스멀 고조되는 불안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행과 광기,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메슥거림은 엘리슨의 단편에서 흔히 그려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재난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결함에 기인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콘돔을 쓰는 대신 여자에게 낙태를 시키는 남자가 버려진 아이들의 지옥에 떨어지는 <크로아토안>(1975)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렇듯 엘리슨의 작품에서 인간은 악의에 찬 신들의 장기말이고 놀잇감으로 희생당하면서도 직접 산제물을 바치며 재앙을 초래하는 광신도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전쟁, 죽음, 파멸은 현실 세계의 것이지만 엘리슨이 그리는 그림에는 이를 흠향하는 사악한 신이 전체 구도를 지배하는 소실점처럼 자리한다. 이 책의 수록작 중에는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1967)가 대표적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컴퓨터 AM이 복수심을 충족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살아 있는 채로 영원히 고통받게 만든다는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만화, 게임,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1995년 작 게임에 수록된 AM의 목소리는 엘리슨이 직접 담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매 맞는 개가 낑낑대는 소리>(1973)는 1968년에 실제로 있었던 유명한 살인사건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칼을 든 남성에게 강간 살해된 사건이었다. 작중에서처럼 살인자는 제노비스가 비명을 지르자 놀라 도망쳤지만 아무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자 다시 돌아와 마저 그녀를 죽였다. 신문은 그녀의 비명을 들은 주변 아파트 거주민 중 누구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노골적인 비난을 토했다(실제로는 신고가 있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방관자 효과’를 제안했다. 엘리슨은 이 사건을 ‘신의 부재’와 ‘사악한 신의 탄생’으로 형상화한다. 현대 인간이 지닌 냉혹함, 둔감함, 자기 중심성이 결국 인간들 자신을 끔찍한 새 신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는 아이라 레빈의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나중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에 나타나 있듯 우리 이웃의 평범한 주민들이 사탄숭배 집단이라는 의혹이 떠돌던 때이기도 하다.


 베트남전 후유증을 드러낸 <바실리스크>(1972)는 전쟁과 민주화에 얽힌 70년대 미국의 부조리를 담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과 들불처럼 일어난 반전 평화운동, 민주주의 운동은 미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퇴역군인들의 PTSD 연구 및 피해자 보상 문제도 함께 부상했다. 미국이 1964년 베트남전에 참전해 1973년 철수할 때까지 많은 작가가 군대에 징집되어 이러한 부조리와 마주했으며, 육군에서 대체복무로 종사한 엘리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바실리스크> 말미에 나오는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은 유명한 반전 및 민주주의 운동 구호이자, 한창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던 존 레논이 1971년 발표한 노래 제목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이를 음미하는 대목은 인간의 나약함과 잔인함을 파헤치기를 서슴지 않았던 독설가 엘리슨다운 결정타라 하겠다.


 이렇게 ‘사악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죽음새>(1973)를 통해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데 이른다. ‘불타는 덤불’로 나타나는 ‘미친 자’는 AM처럼 질투하고 분노하고 벌하는 하나님이다. 구약성경의 소재는 이후로도 종종 나타나는데, <아누비스와의 대화>(1995)는 인간의 죄와 분노한 신이라는 테마를 변주한 단편이다.


3. 앙팡 테리블, 약간 녹은


 50년에 걸쳐 풍부한 작품군을 보유한 엘리슨은 SF 작가보다는 그저 작가라고 불리길 선호한다고 말한 바 있다(“SF 작가라고 불러봐, 너희 집에 나타나 네 애완동물을 테이블에 못 박아버릴 테니”). 밴 보트와 합작한 <인간 오퍼레이터>(1970)는 SF 팬이 기대할 법한 SF지만,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도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그대로 단편으로 이어간 <괘종소리 세기>(1978),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을 모두 수상하며 격찬을 받은 <제프티는 다섯 살>(1977), 죽음을 더없이 아름답고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지키는 기사>(1985), 상실의 아픔을 ‘타나토스의 입’으로 만든 <꿈수면의 기능>(1988) 네 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간의 비가역성을 애도한다.


 특히 <콜럼버스를 뭍에 데려다준 남자>(1991)는 장르소설을 거의 뽑지 않는 <미국 베스트 단편소설집>에 수록되는 쾌거를 누렸다. 작중에 언급되는 셜리 잭슨의 단편은 이 중편의 전신이나 다름없으니 아직 읽지 못한 독자라면 작품의 주인공 레벤디스의 말대로 “성경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 셜리 잭슨의 단편 <땅콩과 보내는 평범한 하루>나 다시 읽는” 시도를 해봐도 좋겠다. 하루는 선행, 하루는 악행을 행하는 레벤디스의 모습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견 작가가 되면서 인간의 증오와 사랑을 다루는 엘리슨의 관점은 장르에 매이지 않는 만큼이나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발전한다. 끔찍한 악동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점은 여전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은 나이를 먹으면서 부드러워졌다는 평을 듣는다. 아라비안나이트를 현대에 재현한 <지니는 여자를 쫓지 않아>(1982)는 이전 작품과 같은 작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쾌하고 행복한 우화다. 남편의 열등감을 숨김없이 지적하는 점이 여전히 심술궂긴 하지만 말이다.


 <허깨비>(1988)의 화자인 비징치는 예의 ‘사악한 신’들과 다름없는 가공할 악인이지만, 인류를 지옥도에 빠뜨리는 대신 인류 스스로 바닥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 비징치가 두루마리에서 뽑아낸 이야기 조각들은 파멸과 선택을 앞둔 ‘잠 카레트’, 즉 여분의 시간을 포착하고 있다. 장면 하나하나는 흔들 때마다 모습이 변하는 만화경처럼 다채로우면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본질을 관통하는 희미한 기회가 있다. 그 희미한 기회야말로 자신의 세계에서 납치당해 “영원한 고통에 사로잡힌 채 브라운 씨네 거실에 남겨진” 금속 군인을 어디에도 없는 억양으로 말하는 남자로 이어주는 미싱링크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 후기작 <쪼그만 사람이라니, 정말 재미있군요>(2009)의 두 가지 결말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슨이 인간에게 제시하는 길은 둘 다 냉혹하기 그지없지만, 우리한테는 끝이 정해지기 전에 숙고할 시간이 주어진다. 절망과 통곡의 도돌이표만 남았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훨씬 풍성한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4. 고통과 즐거움을 균형 있게


 할란 엘리슨은 책을 기획하고 작품을 발굴하는 데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그의 특별 휴고상 둘은 편집자로서 받은 것이다. 《위험한 비전(Dangerous Visions)》(1967), 《다시, 위험한 비전(Again, Dangerous Visions)》(1972)은 할란 엘리슨의 이름 아래 뉴웨이브의 걸작을 모은 앤솔로지다. 《메데아: 할란의 세계(Medea: Harlan’s world)》(1985)는 공동으로 허구의 세계를 창작한다는 ‘공유 세계’라는 발상을 초창기에 시도한 프로젝트로, 할란 엘리슨 외에도 폴 앤더슨, 할 클레멘트, 토머스 M. 디쉬, 프랭크 허버트, 래리 니븐, 프레데릭 폴, 로버트 실버버그, 시어도어 스터전, 케이트 윌헬름, 잭 윌리엄슨이 참여했다. 이는 ‘공유 세계’ 작품 중에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잡지 중심이던 당시 SF 시장에서 앤솔로지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엘리슨의 《위험한 비전》과 《다시, 위험한 비전》은 뉴웨이브의 매력을 한눈에 보여주며 인상적인 위치를 점했다. 개별 수록작만이 아니라 선집으로도 수상 후보가 될 정도였다. 두 권의 작가 목록에는 폴 앤더슨, 레이 브래드버리, 새뮤얼 딜레이니, 필립 K. 딕, 필립 호세 파머, 딘 쿤츠, 어슐러 K. 르귄, 프리츠 라이버, 조애나 러스, 데이먼 나이트, 래리 니븐, 로버트 실버버그, 시어도어 스터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커트 보네거트, 케이트 윌헬름, 진 울프, 로저 젤라즈니 등 쟁쟁한 이름이 늘어서 있다. 수록 작가 상당수가 당시에는 신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탁월한 안목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앤솔로지 《마지막 위험한 비전(The Last Dangerous Visions)》은 앞의 두 권과는 다른 이유로 특별한 책이 되었다. 조지 R. R. 마틴의 말을 빌리면 “그 책이야말로 같은 분야의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SF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집”이다. 발매 지연이라는 분야에서 전설적인 게임이라 할 만한 타이틀 ‘듀크 뉴켐 포에버’를 압도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엘리슨은 이를 1973년에 출간하기로 했고, 책이 곧 나온다고 거듭 장담했고, 1979년에는 수록작 목록을 갱신했으나 결국 출간하지 못했다. 엘리슨에게 원고를 보낸 작가는 약 150명에 이르며 다수가 원고를 살리지 못한 채 사망했다. 엘리슨의 거듭된 호언장담으로 고통받은 작가 중 하나인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급기야 《마지막 위험한 비전》의 미출간 사태를 철저히 규탄하는 <마지막 허황된 비전(The Last Deadloss Visions)>을 썼다. 그리고 이를 책으로 확장한 《영원의 경계에 선 책(The Book on the Edge of Forever)》으로 휴고상 논픽션 부문 후보에까지 올랐다.


 엘리슨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보니 농담 반 진담 반의 단체 ‘엘리슨의 적들(EoE, Enemies of Ellison)’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입비를 낸 회원들은 배지와 뉴스레터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단체는 ‘적’이라는 단어가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중에 ‘엘리슨의 희생자들(Victims of Ellison)’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만일 엘리슨의 친구이고자 하면 이에 대항하는 단체 ‘엘리슨의 친구들(FoE, Friends of Ellison)’에 지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 우리의 마음 따뜻한 이웃 엘리슨에게 감동했던 사연을 보내면 배지와 뉴스레터를 받는 식이었다. 인크레더블 헐크, 아쿠아맨 등의 코믹스를 만든 피터 데이비드가 시작한 이 단체는 ‘적들’보다 10배의 편지를 받았다.


 엘리슨이 비록 까다로운 기준과 무자비한 평가로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선사했더라도, 좋은 글은 솔직하게 칭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후배 작가 양성에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 엘리슨이 미국 극작가 협회에서 주최하는 오픈 도어 프로그램 강사로 있을 때 가난한 작가 지망생이었던 옥타비아 버틀러를 지도한 일은 그의 평생의 자랑거리였다. 인종 분리 정책의 잔재가 남아 있던 시기임에도 엘리슨은 흑인 여성인 버틀러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그녀는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흑인 여성 SF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답게 엘리슨은 현장에 뛰어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청소년 범죄에 관해 쓰기 위해 가짜 신분으로 브루클린 갱단에 들어갔고, 롤링 스톤즈 등과 함께 여행한 뒤 로큰롤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흑인 참정권 운동을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에게 작가로서 활동하는 일과 사회 활동은 별개가 아니었다. 1978년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성평등 헌법 수정안(ERA, Equal Rights Amendment)을 지지하며 벌였던 독특한 시위가 그 예다. 엘리슨이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열리는 월드컨에 주빈으로 초대받았을 때인데, 당시 애리조나 주의회는 ERA를 비준하지 않으며 반대 측에 선 상태였다. 엘리슨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애리조나에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컨벤션에서 제공하는 호텔을 거부하고 모든 생필품을 실은 자신의 RV에 머무르며 체류 기간 내내 정말로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페미니스트냐 하면, 2006년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받으면서는 진행자인 코니 윌리스에게 짜증을 내며 가슴에 손을 댄 사건도 있으니 평가하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다. 엘리슨은 자주 사람들이 이전 시대의 역사를 모르고 바보가 되어 간다고 분노했고, 속어, 외설, 신조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미디어 비평을 쏟아냈다. 그의 비평은 《유리 젖꼭지(The Glass Teat)》, 《다른 유리 젖꼭지(The Other Glass Teat)》로 묶여 휴고상 논픽션 후보 부문에 올랐다. 그는 자유주의자이고, 인권단체를 지지하고, 평생 검열 반대 활동을 했다. 국제 작가 연맹(PEN international)은 예술의 자유에 공헌한 엘리슨의 노력을 기리는 의미로 그에게 실버 펜을 수여했다.


 할란 엘리슨에게 감탄하기는 쉽지만 그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엘리슨의 글을 좋아하기는 매우 쉽다. 그는 나폴레옹보다 작고 히틀러보다는 더 작은, 어릴 때부터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렸던, 아직도 수동 타자기로 글을 쓰는, 자기 이름이 상표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엘리슨에게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미국 단편 작가 중 하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20세기의 루이스 캐롤”이라는 별명을 달아주었다. 할란 엘리슨 전기 영화 <날카로운 이빨의 꿈들(Dreams with Sharp Teeth)>(2008)은 그를 이렇게 칭한다. 천재, 괴물, 전설이라고.


- 심완선, SF 칼럼니스트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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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간된 <스페이스 오디세이>(김승욱·이지연·송경아 옮김, 황금가지 펴냄) 4부작을 위한 부록 중 하나입니다. 출판사 황금가지는 세트 구매자를 위한 특별 부록으로 12인의 저자가 쓴 헌정문을 모아 <우주의 먼 별에서 -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완간을 기념하며>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레시안>에서 <스페이스 오디세이> 출간을 기념하여 2017. 2. 16. 이 글을 전문 게재하였습니다. 기사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0751


언제나 그랬듯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는 인공지능, 우주 비행, 그리고 인류의 진화에 관해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애플 기기에 추가된 인공지능인 시리에게 HAL 9000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그녀는 '누구나 그에게 일어난 일을 안다'는 답을 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화에서는 빨간색 모노렌즈와 억양 없는 목소리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HAL은 작중 우주선 디스커버리 호의 제반사항을 통제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이다.  

MIT출판부는 HAL의 소설판 생일인 1997년을 기념하며, 2001년의 인공지능이 어떠할지를 다루는 <HAL의 유산(HAL's Legacy)>을 출간했다. 마찬가지로 기념비적인 2001년에는 같은 주제를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BBC에서 제작되었다. 픽션 속 우주여행이 실제로 가능할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해졌는지 점검하는 다큐멘터리들이 심심찮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이름을 빌렸으며, 전설적인 과학 다큐멘터리 시리즈 <코스모스>를 리부트한 2014년 판의 정확한 제목은 <코스모스: 우주 오디세이(Cosmos: A Spacetime Odyssey)>다. 이외에도 원숭이 우두머리가 집어던진 뼈다귀가 허공에서 최첨단 우주선으로 변모하는 장면이라든가, 달의 뒷면에 우뚝 선 '모노리스'의 모습을 차용한다면 아무런 설명이 없더라도 그것은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오마주하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도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언제든 다음 단계를 찾는 인간상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2014년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는 여러모로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흡사한데, 특히 영화의 캐치프레이즈 "우리는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는 바로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반복되는 주제다.  

어떤 사람들에게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아직도 현실로 체현되는 과정에 있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이 4부작 소설을 지금 다시 읽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시리즈로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거의 반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이야기다. 1964년 아서 C. 클라크와 스탠리 큐브릭은 각각 소설과 영화를 맡아 4년 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출간 및 제작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는 인류가 우주를 향해 전례 없는 열광과 예산을 쏟아붓던 시기였다. 미국의 우주 개발 예산은 1966년 최고치를 기록했다. 뉴스에서는 자부심과 낙관주의의 세례가 쏟아졌을 것이다. 우주 탐사를 손에 잡힐 듯 그려 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시기상 그런 열망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1968년 최초로 달의 뒷면을 목격한 아폴로 8호의 승무원들은 모두 이 작품을 본 상태였고, 달에 커다란 검은 모노리스가 있다고 보고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고 고백했다.  

영화 <아폴로 13>으로도 만들어진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은 텔레비전 보도용 영상을 송출하기 위해 배경음악으로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상징이 되어버린 웅장한 오프닝 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골랐다. 1977년 발사된 보이저 1호는 우연찮게도 소설과 똑같이 목성의 중력을 이용해 가속도를 얻는 섭동 기동을 실현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출판사는 클라크에게 후속작 원고료로 800만 달러(약 70억 원)를 제시했다고 한다. 

클라크는 목성에 간 보이저 호와 파이어니어 호가 수집한 최신 정보를 반영해 1982년 <2010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발표했다. 이처럼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는 인류의 우주 진출 역사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확장된 이야기이고, SF소설의 그랜드마스터 아서 C. 클라크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작가로서 아서 C. 클라크는 SF 소설이 자아내는 경이감을 느리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사하는 단편을 다수 남겼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에서는 비록 3부작을 넘기는 과욕을 부리고 말았지만, 그가 독자들을 매혹하고 우주를 갈망하도록 만드는 솜씨는 변함없이 탁월하다.  

단편에서든 장편에서든 그 매혹의 성공 비결은 바로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뱃사람들이 상상한 깊은 바다 괴물처럼 압도적인 이야기를 마치 하드보일드 탐정의 관찰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주선 후미로 수많은 냉각관이 섬세하게 얽혀 지느러미 혹은 잠자리 날개처럼 연결된 모습, 극단적인 온도 때문에 지옥같이 끓어오르는 이오의 풍경과 더없이 장엄한 질량을 뽐내는 목성, 갖가지 색깔이 미세하게 변화하며 장대하게 움직이는 토성의 고리가 글자로 그려진다. 총천연색 우주 사진이 야기하는 종류의 엄청나게 거대하고 믿을 수 없게 낯선 이미지를 찬찬히 소설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엄밀성과 사실적인 서술 때문에 작품 전반에 진하게 깔린 신비주의적 요소가 사풋 설득력을 갖는다. 클라크는 토성의 환경을 성실하게 서술하던 태도 그대로 외계의 정신체를 묘사하며 과학과 신비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작중 '스타차일드'가 나타나는 순간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이다. 여기에는 우주 어딘가 인간을 한없이 뛰어넘은 지성체가 존재하리라는 믿음, 그리고 인간이 언젠가 그런 영역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이 보인다. 인간원숭이가 인류로 진화하는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인류 운명에 대한 암시는 너무 노골적이라 이들 앞에 나타나는 모노리스를 십계의 석판으로 비유해도 좋을 정도다. 

사실 "'신'일 수밖에 없"을 만큼 인류보다 훌쩍 앞선 모노리스의 제작자들은 강력하고 불가해하다는 점에서 H. P.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코스믹 호러의 신들, 그레이트 올드 원과도 닮았다. 그러나 클라크가 그리는 '신'은 인류에 깊은 관심을 표하며, 지금은 불가해하지만 언젠가는 인간에게 해석되리라고 기대를 주는 존재다. 결국 어떤 초월자든 인류에서 한없이 아득하게 이어지는 연장선인 것이다. 이는 클라크의 다른 대표작인 장편 <유년기의 끝>(정영목 옮김, 시공사 펴냄)이나 단편 <별>에서도 되풀이되는 주제로, 결국 인류와 초월자는 아득하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확실하게 연결된다. 과연 철저한 이신론자로 유명했던 사람다운 신앙 고백이다. 이성을 초월한 영역을 인정하되, 어떤 초월자라도 언젠가는 모두 이성의 영역으로 포섭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런 미래가 너무 공상적이라는 비판을 미리 차단하며 닐스 보어의 말을 인용한다. "당신 이론은 터무니없지만, 진실이 될 만큼 터무니없지는 않다." 소설은 터무니없지만, 터무니없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과학이란 지식일 뿐만 아니라 태도이기도 하다. SF 소설의 장기는 현재의 과학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SF 소설이 터무니없으면서도 과학적인 이유는, 아직 모르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언젠가 이해하게 되리라는 믿음, 아직 넘어 본 적 없는 장벽 너머로 도전하는 정신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는 이야기 내내 열린 결말로 끝을 맺으며 독자에게 항상 다음 단계를 열어 놓는다. 그리고 괴물을 물리치고 보화와 미녀를 얻는다는 식의 모험담과는 다른 범주의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새로운 세계를 알고 싶다는 설렘, 상상으로나마 그곳에 도달한다는 짜릿함이다.  

큐브릭은 이런 면에서 일찍이 클라크와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찬사를 바친 바 있다. "요람 같은 지구에서 우주 속의 미래를 향해 손을 뻗은 인류의 모습"을 그만큼 잘 다룬 사람이 없다고. 지금 책을 읽는 독자라면 처음 이 시리즈가 출간됐을 때와는 다르게 이미 2001년과 2010년을 잘 알고 있다. 21세기 사람들은 태블릿 PC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종이 신문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목성과 토성을 넘어 명왕성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달 개척도시는 없고, HAL처럼 두루 뛰어난 강인공지능은 개발되지 않았고, 우주는 여전히 세상의 끝이며 뛰어난 소수만이 개척하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우주에 우리 말고 다른 문명이 기다리는지 아닌지 모르기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다음 단계는 언제나 열려 있고, 이것이 우주 시대를 열광시켰던 동력이자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가 아직 현재진행형인 이유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이 다음 방법을 찾아낼 것이며, 그렇게 누구도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곳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여는 독자든 다시 방문하는 독자든, 부디 건투를 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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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모리 고의 추리소설 단편집. 좋게 말하면 고아하고 정취있는 글이다. 대놓고 말하면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밍밍한 분위기가 난다. 트릭보다는 인물의 사연에 집중하고, 날선 목소리로 범인을 지목하기보다 사건의 이면에 있었을 법한 일들을 추정하며 제삼자들이 맥주 한 모금을 넘기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첫 단편이자 표제작인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자기 신상에는 입을 다문 채 쓸쓸하게 죽어간 나이든 하이쿠 시인 소교의 생애를 쫓는다. 이 단편의 화자로 소교의 고향을 추적하는 이지마 나나오는 20대 후반의 프리랜서 작가다. 생전의 소교를 애틋하고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꼭 고향으로 돌려보내 드릴게요'라며 몇 번이고 다짐한다. 

 이후의 단편들도 농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굳이 추리소설로 분류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얌전하고 감상적이다. 다만 먹고 마시는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강렬해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책에서 공통된 배경으로 그려지는 것은 신타마가와선 산겐자야 역 근처 골목에 위치한 맥주바 가나리야다. 그리고 탐정 역할을 하는 것이 가나리야의 주인 구도 데쓰야다. 손님들은 각자의 이유로 가게를 찾고, 구도는 각 손님에게 맞는 맥주 한잔과 그냥 맥주바에서 다루기는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안주를 내놓는다. 그렇게 먹고 마시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수수께끼 놀이가, 고민 상담이, 시덥잖은 이야기에서 간절한 사연까지. 손님들은 너무 지쳤거나 혹은 이야기에 몰두해서 중간중간 나오는 안주에 소홀해지기도 하지만 그 묘사는 대신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구도가 내놓는 첫 접시는 이렇다. 


 "올해 마지막 동과를 다진 고기와 함께 졸이고 칡으로 찰기를 더해 보았습니다. 콩소메 맛이라 맥주와 잘 어울릴 겁니다." (17p)


 동과는 대체 무슨 맛인가. 동과는 박과 식물에 속하고, 겉은 종류에 따라 애호박이나 무처럼 생겼고 속은 오이나 참외처럼 생겼다. 무처럼 살짝 아리고 아삭한 맛이라고 한다. 무와 비슷하게 생채나 조림으로 먹거나, 아니면 볶거나 쪄서 먹는다. 고기와 함께 졸였다면 양념이 배어 간간하면서 무르게 씹힐 것 같다. 칡으로 찰기를 더한다는 말도 낯선데, 생각해보니 칡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뿌리를 먹으니 마나 토란처럼 갈아낼수록 끈적한 맛이 날 것이고, 검색해보니 씹다 보면 은은한 단맛이 난다고 한다. 게다가 이 모든 조합은 콩소메 맛이다. 콩소메는 야채를 넣고 끓여 걸러낸 맑고 담백한 고깃국물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안주는 국물이 별로 없이 양념이 깊이 배어 은근한 단맛과 부담스럽지 않은 감칠맛을 내는 요리일 것이다. 먹어보지 않으면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맥주와 잘 어울린다니 그걸로 되었다.

 두 번째 단편부터는 가게에서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가 주축이 된다. 만약 퇴근 후 단골 가게에 찾아가 주인이 내주는 술에 몸을 맡기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음의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구도가 물었다.

 "도수가 조금 높은 것으로."

 "괜찮으십니까?"

 "철야를 며칠 했을 뿐이야. 오늘은 술에 취해 푹 자고 싶어."

 그런 짧은 대화를 나누고 구도는 네 개의 비어서버 중 가장 안쪽의 금속 꼭지에 필스너 글라스를 갖다 대었다. 이 가게에는 알코올 도수가 다른 맥주가 네 종류 있다. 구도는 그중에서 가장 도수 높은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늘 마시던 맥주에 비해 황금빛이 훨씬 진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끌려들 것 같았다. 글라스의 내용물에 입술을 대자 먼저 차가움, 다음에는 발포성 음료 특유의 신맛이 잇몸에 섞이고 스며들었다. 맛있다는 말 대신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67p)


 또한 등장하는 안주 중 가장 호화로운 것은 청주와 간장으로 간하고 버터로 마무리한 가리비 요리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두 남자에게 노다도 같은 인사를 하는 동안, 구도가 무럭무럭 김이 솟아나는 납작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납작한 접시로 보였던 것은 가리비 껍데기였다. 그것도 보통 크기가 아니다. 프로레슬러의 손바닥을 확대한 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가리비 껍데기였다. 그 가장자리까지 맑은 수프가 가득 담겨 있었고, 드문드문 하얀 살이 비쳐 보인다. 그리고 길고 가는 살이 몇 점. 수프에 떠 있는 기름 막에서 버터 향기가 강렬하게 코로 돌진한다.

 "삼 년산 가리비입니다."

 그 말을 들어도 노다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코키유(coquille, 조개껍데기에 재료를 담아서 굽는 서양 요리)라기보다는 '전골'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가리비를 껍데기째 사용해 보았습니다. 양념은 청주와 간장뿐이고, 마무리로 버터를 조금 넣었습니다. 요란하죠?"

 식기 전에 어서 들라는 권유에 마침내 노다는 젓가락을 들었다.

 "어떻습니까?" 구도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어도, 솔직히 노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된 철야로 미각이 생각보다 둔해졌기 때문이다. 혀끝에 비닐이라도 덮어 놓은 것처럼 맛이 어딘가 멀리서 느껴졌다.

 맥주로 입안을 헹구고 다시 젓가락질을 하자 조개 특유의 감칠맛이 훨씬 깊어졌다. 희미하게 붉은 기가 남아있는 살을 입안에 넣자 지금껏 먹은 섬유질의 감촉과는 별도로, 이번에는 끈끈한 페이스트 느낌의 감칠맛이 났다.

 온몸으로 그 맛을 느꼈다.

 수면 부족과 과도한 흡연으로 식욕 따위는 어딘가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맥주가 생각지도 못한 빠른 속도로 없어졌고, 조갯살이 기분 좋을 정도로 담백하게 목을 통과한다.

 볼썽사납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조개껍데기에 입을 대고 남은 수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운 후, 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68-69p)"


 덕분에 이틀 연속으로 야식을 챙겨먹고 이 글을 정리하는 오늘도 야식거리를 꺼냈다. 먹는 묘사를 읽을 때는 사치를 부려 좋아하는 먹거리를 한 입 한 모금 먹는다. 묘사에 지지 않을 만큼 맛있는 것을 마련하지 못하면 읽기를 미뤄두기도 한다. 구도가 내놓는 맥주와 요리처럼 군침 도는 푸드 포르노는 언제나 환영이다. 해설에서는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두고 "아유카와 데쓰야의 '긴자 3번관'을 계승하는 바텐더 탐정물"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눈이 번쩍 뜨여 얼른 찾아봤으나 이 시리즈는 번역은 안 된 모양이다. 아유카와 데쓰야의 책은 [리라장 사건](1958)만 읽어봤다. 이쪽도 고풍스러운 추리소설이었다. 다만 [꽃 아래 봄에 죽기를](1999)처럼 애잔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58년작이라서 아무리 인물 간에 애증이 교차하고 싸움이 횡행해도 필터를 하나 끼운 듯 멀리서 읽히기 때문이다. 구도 데쓰야의 이름이 혹시 아유카와 데쓰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한데.

 기타모리 고의 소설이라면 '가나리야 마스터'시리즈 2부인 [벚꽃 흩날리는 밤]도 나와있다. 여전히 맛있는 요리들이 나오는 모양이다. 출판사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낸 다른 시리즈로는 '가마슈 경감' 시리즈도 추천한다. 퀘벡 주의 한적한 마을 스리 파인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지 미스터리다. 칙릿과는 관련이 없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처럼 단촐하고 조용하되 인간 내면에 깃든 어두움을 본다. 저자인 루이즈 페니는 지금까지 수상한 애거서 크리스티 상으로 축구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를 획득한 작가다. 그리고 여기 스리 파인즈에서도 사람 마음을 데워주는 맛있는 아침식사가 나온다. 꼭 그래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분명히 좋아하는 점이기는 하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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