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개봉을 앞두고, 2017. 12. 4. 웹진 ize의 '우먼스플레인'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7120322407252418




옛날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스타워즈 시리즈를 말로만 들었던 오랜 세월 동안, 내게 ‘스타워즈’는 아버지 스카이워커에서 아들 스카이워커로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제국의 역습’의 유명한 대사 “I am your farther”와 “Noooooo”의 클리셰는 온갖 곳에서 심심찮게 등장했다. 알고 보면 스카이워커 집안의 또 다른 적자인 레아 공주의 이름은 그놈의 ‘황금 비키니’ 농담에서 처음 들었다. ‘제다이의 귀환’ 편에서 레아 공주가 납치되어 황금색 비키니를 입고 나오는 장면에 성적으로 판타지를 품게 된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레아 공주를 스타워즈 팬덤의 섹스 심벌로 만들어준 이 의상은 경매에서 1억 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

비단 ‘스타워즈’로 한정할 것 없이, 여타 장르와 마찬가지로 SF 역사는 황금 비키니 투성이다. 초기 SF의 성장 기반이었던 대량의 펄프 픽션은 남자 주인공이 모험을 하고 예쁜 여자를 구하는 이야기를 무대만 우주로 바꾼 내용이었다. 이들 세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 등장인물과 작가와 작가 머릿속의 예상 독자가 죄다 백인 남성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인류 구성원 대다수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남성 SF 작가들은 인류의 대표자가 어쩐지 늘 백인 남성인 이야기를 썼다. 유명한 작품이라고 아무거나 집었다가는 “인류에게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는 인류라고는 죄다 남자들뿐인 꼴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이름이라도 나오는 여성은 여객기 승무원, 비서, 동료의 어린 딸 3명뿐이다. 이들은 중책을 맡은 남성 등장인물들에게 상냥하고 천진한 말을 두세 마디 던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세계는 촌스럽다. 인간을 우주 끝까지 보내는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그 인간이 남자가 아닐 수 있다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한 티가 나기 때문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온갖 외계 종족이 뒤섞인 사회에서 하필 백인 남성만이 주연을 맡았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드라마 ‘닥터 후’의 주인공 닥터는 매 시즌 육체를 재생성하지만 어째서인지 백인 남자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편향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당연하지 않다. 내가 첫 불평가도 아니다. SF 역사의 다른 축은 젠더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뜯어 발기는 각축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SF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구현하고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사회적, 육체적, 성적으로도 변혁이 일어난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생각”, 특히 1960년대 이후 젠더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성운동은 SF 창작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여성, 흑인, 레즈비언, ‘백인’과 ‘남성’에 어긋나는 많은 이들이 SF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문학적 실험을 펼쳤다. 젠더가 정해지지 않은 종족의 ‘어둠의 왼손’(1969), 여성우월주의를 가정한 ‘이갈리아의 딸들’(1977), 육체의 성별을 마음대로 바꾸는 ‘레오와 클레오(Options)’(1979), 남성이 멸종한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When It Changed)’(1972) 등이 그 결과물이다. 당시 흑인 SF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는 “근래 좋은 SF를 쓰는 작가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를 제외하면 전부 여자”라는 평을 남겼다. 백인 남성만이 SF를 만들었다면 그 상상력의 범위는 형편없이 좁았을 것이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남성 필명으로 글을 쓴 여성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은 젠더 개념을 실험하고 확장한 작품에 수여된다.

SF는 비현실이지만, 우리가 현실을 보는 법을 변화시킨다. ‘스타 트렉’ 오리지널 시리즈가 당시 매카시즘 광풍을 비켜 간 이유는 그것이 ‘허무맹랑한’ SF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흑인 여성인 우후라가 통신 장교로 함교에 서는 비현실적인 설정도 SF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록 오리지널의 우후라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비서나 전화교환수 노릇을 하지만, 그는 흑인 여성도 우주 비행이 가능하다는 아이콘이었다. 우후라를 연기한 배우 니셀 니콜스는 이후 NASA의 직원 모집 캠페인에서 전국 순회 홍보를 했다. 그는 “NASA는 흑인 여성도 뽑는답니다”라고 선전하기에 최적인 인물이었다. 최초의 흑인 여성 우주인이 된 메이 제미슨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21세기인 지금은 SF 시리즈 3대장으로 꼽히는 ‘스타워즈’, ‘스타 트렉’, ‘닥터 후’의 모든 중심인물이 여성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일부의 우려와는 다르게 아무 재앙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백인 남자가 주인공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제 나는 레아를 황금 비키니가 아니라 저항군 사령관으로 기억한다. 레아를 연기한 유쾌하고 꼬장꼬장한 배우 캐리 피셔 이야기도 알고 있다. 캐리 피셔는 새로이 ‘스타워즈’에 합류한 배우 데이지 리들리에게 “넌 노예처럼 보이는 황금 비키니는 입지 마”라고 조언했다. 리들리가 연기한 여성 주인공 레이는 황금 비키니도, 흰색 시스루 드레스도 입지 않는다. 대신 출생의 비밀을 품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섰던 자리에서 광선검을 든다. 아버지와 아들 서사를 비집고 여성과 흑인이 중앙에 나오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새 ‘스타워즈’ 시리즈 캐스팅을 두고 절대 안 된다느니, 진짜 ‘스타워즈’가 아니라느니 하는 비난이 많았다. 그렇지만 SF야말로 고정관념을 깨는 장르다. 그리고 고루한 “절대 안 돼”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기란 즐거운 일이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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