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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03 [혁명의 영점]: "우리 투쟁의 목적은 이 노동을 종식시키는 것"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중 1부 가사노동과 임금 중

3장 〈부엌에서 만든 대안〉 발제문

 

신은 24시간 대기하는 전일제 무보수 만능 심부름꾼이라는 농담이 있다. 신의 손길은 몰라도 가정을 수호하는 손길은 흔히 보이는데, 수많은 여성들이 벽난로 앞의 천사로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는 만능 하인 노릇을 맡아온 덕이다. “엄마, 오늘 저녁 뭐야?”, “엄마, 내 티셔츠 못 봤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자기야, 오늘 저녁 뭐야?”, “자기야, 좋았어?” 이러한 봉사는 너무나 중요하고 신성한 영역이기에 가사노동, 감정노동, 재생산 활동은 감히 자본주의 생산구조의 일익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이처럼 생산이 인지되지 않는 노동,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가치한 노동을 전담하는 여성 노동자는 무용한 존재로 취급된다. “우리 엄마 집에서 놀아요.”, “하는 건 돈 쓰는 일밖에 없으면서.”

 

[혁명의 영점]1부는 가사노동의 임금투쟁을 다룬다. 3장은 원래 여성과 가사노동에 대한 보수라는 좌파 이론가 로페이트의 글에 대한 반론이었다. 페데리치의 혁명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임금투쟁을 통한 여성해방과 이로 인한 노동자 전체의 자유. 이는 노동과 노동계급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자본주의의 임금체계 밖에서도 대가를 주장하며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의 글로 유추하건대 로페이트의 글에는 임금을 중심으로 노동-비노동, 생산-기생, 잠재력-무력함을 나누는 이분법이 등장한다. 여기서 여성은 진정한 노동계급이 아니라 노동자 이전의 상태에 있기에 우선 자본을 통해 조직되어야, 즉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페데리치가 반박하기를, 여성은 이미 노동자다. 여성이 떠맡은 노동력 생산 노동이 임금을 못 받는 부불노동이라 무시될 뿐이다. 사회는 아이와 함께 놀러간다는 활동을 노동이 아니라 엄마의 여가라고 부르는 식으로 가정 내 여성의 노동에 투명 망토를 씌운다. 현재의 ()가족, 돈 버는 가장과 집을 돌보는 아내라는 역할분담은 안정된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근대의 창조물이고, 여성부불노동을 제도화하는 현대의 노예제다.

 

설령 여성이 가사분담을 하고 맞벌이를 하더라도, 집 밖으로 나가 임금노동자가 되더라도, 여전히 집안일과 애보기가 여성의 영역으로 취급된다는 점과 노동시장이 여성에게 가정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일자리 혹은 남성 대비 70%의 임금만을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여성은 경제력과 발언권에서 약자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 임금노동자는 반찬값을 버는 사람이고, 결혼한 남자들보다 먼저 해고할 대상이다. 반면 주업인 가사노동에는 아무도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에 누구도 이 노동량과 생산량을 재지 않는다. 가치가 없어서 부불노동이 된 게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여자는 노동계급에 기생하는 비노동계급이라는 비난을, 여성은 바로 그녀들이 길러내는 노동력에게 듣는다. 남자들이 힘들게 번 돈을 펑펑 써대는 속편한 여자들이라는 짜릿한 피해의식의 기원이다.

 

가사노동에 임금을!”은 노동자들이 제 삶을 찾는 데 다방면으로 기여한다. 당장의 경제력은 빈곤=여성의 공식을 깨는 비상탈출용 망치가 될 것이며, 이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넘겼던 목소리를 돌려줄 것이다. 계급투쟁을 위해 단결하라는 좌파의 정언명령은 대표성 획득에 실패한 이들의 발언권을 거두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노동자는 단일체가 아니라 (무임금을 포함해) 임금으로 규제 및 분할되고, 임금격차는 다시 성별이나 인종이나 지역 등으로 배분된다. 노동계급 중에서도 노동계급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댈 건 도덕성이 아니라 힘이다. 자본-노동 관계에서 임금은 권력이기도 하므로, 소외되었던 집단은 임금을 통해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목표는 임금이 아니다. 가사노동의 생산성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가사노동 임금투쟁은 세계 절반이 부당 착취를 당해왔다는 폭로이며, 어차피 착취할 거라면 돈이라도 내놓으라는 뜻이다. 따라서 경제주의적이라는 좌파의 비판은 틀리다. 임금투쟁은 임금상승 요구에 국한되지 않으며, 목표는 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다. 가사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변하면 가정마저 자본에 종속되리라는 지레짐작도 부적절하다. 임금이 노동자를 길들이는 당근과 채찍인 건 사실이지만 무임금이라고 채찍에서 자유로운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해방은 여성만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별은 더 나은 노동자와 더 불리한 노동자를 가르는 여러 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여성의 임금투쟁은 남성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착취구조를 향한 노동자들의 자기주장이다. 결국 그 열매는 제값을 못 받는 모든 노동자의 몫이다. “우리 투쟁의 목적은 이 노동을 종식시키는 것이며”, “가격표를 다는 일은 그 첫 단계이다.

 

다만 가사노동의 임금투쟁에서 전체 노동해방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는 저자가 확신하는 만큼 명확하지 않다. 흑인 남성의 자유가 백인 여성의 자유로 이어지지 않았듯, 어느 한 부문의 해방이 곧바로 전체의 진보가 되리라는 기대는 낭만적이다 못해 이상적이다. 그래도 저자가 한발 물러나 제시하는 안전망은 믿음직하다. 임금은 곧 권력이니 임금투쟁의 성과는 권력으로 돌아온다. 이는 적어도 물질적 기반, 더 큰 투쟁을 위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길이다. 누구 말마따나,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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