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 ize의 우먼스플레인 코너에 실렸습니다. 지금의 한국 여성에게 필요한 5가지로 영웅, 싸움, 부자연스러움, 맞수, 집을 골랐습니다. 소제목이 포함된 버전을 공개합니다. 발행된 글은 아이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ize.co.kr/articleView.html?no=2019110400177279185

 

 

 

여자에게 필요한 5가지 SF

 

 

SF를 추천할 때 어려운 점은 두 가지다. 보통 분량 또는 시간이 제한된다는 점과, 선정 기준을 매번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C. J. 체리의 ‘다운빌로 스테이션’은 SF의 장점인 거대한 스케일을 살린 묵직하고 치밀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작가가 남자들의 세계였던 미국 SF계에서 책을 내려고 이름을 남자처럼 보이게 손 본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러나 분량이 많고 지금과는 거리가 있는 1970-80년대에 나왔다는 점에서 입문자에게 추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성 작가들이 SF에서 그려내는 여성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되, 되도록 최신의, 한국의, 여성 이야기를 골랐다. 지금 우리 사회에 근접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

 

김초엽, ‘나의 우주 영웅을 위하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수록)

 

영웅은 위대한 사람을 뜻하지만 원래 히어로의 어원은 수호자라는 뜻이다. 고전적 의미의 영웅은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며, 자신의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공동체를 구한다. 그러니 ‘나의 영웅’은 뛰어난 개인일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부류를 대변하는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다. ‘나의 우주 영웅을 위하여’에서 ‘재경 이모'는 가윤의 영웅이다. 원래 재경 이모는 최초로 터널을 통과해 우주 저편으로 갈 영광스러운 우주인으로 선발되었다. 재경은 우수한 성적을 내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열렬한 찬사와 기대를 받지만, 동시에 끈질긴 의심과 분노를 샀다. 재경이 작은 체구의 중년 여성, 동양인, 비혼모, 신체적 결함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재경이 표준 우주인은커녕 인간의 표준형에조차 미달한다고 여기고, 재경에게 결함이 없다고 믿을 만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재경은 그에 부합하기를 집어치우기 때문에, 애초에 정상이나 표준을 상정하는 규격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재경은 사회의 ‘부적합’ 판단에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재경의 삶을 향한 비난은 실제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이었다가 기혼 여성이 된 이소연 씨에게 쏟아진 비난과 닮았다. 소설과 현실의 차이는 두 번째 사람, 가윤이 있다는 점이다. 가윤은 재경이 있었기에 우주인이라는 진로로 향했고, 재경이 먼저 떠났기에 그가 가지 않은 길을 택한다. 재경은 가윤의 ‘나의 영웅’이고, 가윤은 영웅을 생각하며 또 다른 ‘최초’가 된다.

 

 

 

싸움

 

마리사 마이어, ‘신더’

 

‘신더’는 ‘신데렐라’에서 모티브를 딴 영어덜트 SF다. 이 소설에는 미성년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계모와 새언니, 넋두리를 들어주는 친구, 사랑에 빠질 만큼 잘생긴 왕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신더는 부엌데기가 아니라 기계공이다. 신더는 재투성이가 아니라 기름때투성이로 지내고, 유리구두 대신 기계 의족을 잃어버리고 떠난다. 이 새로운 동화에서는 주인공 소녀가 신분이 바뀌는 데 왕자님이 필요하지 않다. 신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왕자는 악당 여왕의 위협에 시달리며, 원치 않는 결혼으로 나라를 통째로 빼앗길 위험에 처해 그저 시간을 끌 뿐이다. 그동안 신더는 모험을 떠나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동료를 만나고, 상실과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고, 왕자를 구출하고, 혁명의 아이콘이 된다. ‘신더’의 신데렐라, ‘스칼렛’의 빨간 모자, ‘크레스’의 라푼젤, ‘윈터’의 백설공주는 원래의 동화처럼 각자의 고난에 시달리지만 이들이 싸우는 과정은 결국 모두의 전쟁으로 귀착된다. 이들 혁명군의 미덕은 순종이 아니다. 소녀들이 맡는 역할은 힘껏 싸우는 것이고, 싸우는 자리야말로 동화 속에서는 주어지지 않았던, 주인공의 자리다.

 

 

 

부자연스러움

 

코니 윌리스, ‘여왕마저도’ (‘여왕마저도’ 수록)

 

코니 윌리스의 ‘여왕마저도’의 매력은 다양한 세대의 여자들이 모여 싸우고 흉보고 투덜대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들은 복작복작하게 제 할말을 하지만 모임 주제에는 입을 모은다. 생리는 끔찍하다고. ‘여왕마저도’는 기술 발달 덕택에 ‘암메네롤’ 약 하나면 생리에서 자유로워지는 세상이 배경이다. 그런데 애물단지 딸내미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생리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힌다. 할머니, 엄마, 외할머니, 언니 등이 소환되어 한마디씩 거든다. 생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현실에서도 생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미 존재한다. 물론 ‘암메네롤’과 달리 현실의 해결책은 부작용이 있거나 비싸고 불완전하다. 이런 진입장벽을 넘더라도 오래된 통념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생리가 자연스럽고, 거기서 벗어나면 부자연스럽고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자연적이라고 곧 필수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여왕마저도’ 속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스트 사이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생리 근절 앞에서는 힘을 합쳤다. 자연과 부자연에 관해 할말은 많지만, 한 가지 포인트는 ‘여왕마저도’의 가족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백 년 전에는 ‘여성의 자리는 집 안’인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맞수

 

문목하, ‘돌이킬 수 있는’

 

‘돌이킬 수 있는’은 SF와 스파이 스릴러의 혼합물이다. 건조한 문체와 간결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선뜩한 반전이 나오고, 그 뒤로는 썰물처럼 빠르게 읽힌다. 초능력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능력의 충돌보다는 두뇌싸움에 무게가 실린다.

이 소설은 초능력자를 파쇄자, 복원자, 정지자로 분류한다. 파쇄자는 살아있지 않은 물건을 날려보낼 수 있고, 복원자는 되돌리고, 정지자는 멈출 수 있다. 능력자에 따라 강약은 있지만, 힘 자체는 가위바위보처럼 맞물려 있어 우열이 없다.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폭력조직 비원과 부패한 경찰, 숨기를 택한 경선산성 사람들과 진출을 택한 비원 사람들, 또는 정여준을 죽이려던 윤서리와 윤서리를 죽이려던 정여준은 서로 팽팽히 대치한다. 한쪽이 공격을 택하면 다른 쪽은 정지를 택하는 식으로, 이들은 엇갈리고 공격하고 억누르며 대립한다. 그리고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아 균형이 맞을 경우 생기는 일들이 발생한다. 전쟁, 협상, 이해, 연애다. 연애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상승효과를 내는 대표적인 예다. ‘돌이킬 수 있는’의 중요한 전제는, 누군가 능력을 쓰려면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수신을 하려면 송신이 필요하고 정지하려면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두 힘이 만나야만 가능성이 생긴다. 선택의 시점에,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난 복원자예요. 먼저 폭발해 다가오는 게 없으면 돌려보낼 수 없어요. 그러니 이번 희망도 부서질 때까지 기다려줘야 해요. 적어도 그 전엔 되돌리지 않을 거예요.”

 

 

 

 

정세랑, ‘섬의 애슐리’

 

집은 여행의 최종 목적지다. 성공적인 모험의 결말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밖으로 나서면 좋을까. ‘섬의 애슐리’의 애슐리는 말하자면 집이 없는 사람이다. 애슐리는 섬과 본토 혼혈로, 드물게도 섬 사람의 외모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 그저 까무잡잡한 본토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섬 사람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못마땅하고, 섬 사람을 가벼운 경멸과 호기심으로 구경하는 데 익숙한 본토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존재다. 마을사람들 속에서 애슐리는 챔피언이 한때 본토 뜨내기에게 홀려 태어난 사람, 저항하지 않는 사람, 겉도는 사람이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던 소행성을 격추시키던 날, 정작 격추를 맡은 우주선이 추락하는 바람에 많은 본토 사람이 피난민이 되어 섬으로 흘러든다. 그 과정에 애슐리는 우연히 유명세를 얻고, 가짜 로맨스, 선전을 위한 결혼, 당사자와 상관없는 메시지에 뒤덮인다. 그는 뿌리가 연약한 수상식물처럼 물살이 이는 대로 휩쓸린다. 애슐리는 폭행을 당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 믿고, 솔직하게 말해봤자 저열한 관심에 소모되고 오용될 뿐이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뿌리가 자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애슐리가 추는 민속춤은 사실 짜깁기로 만들어진 것이라 근본이 없다. 그래도 몸에 배어 자기 몸짓이 된다. 그는 삶을 지속하던 어느 순간 자기를 드러내더라도 마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배운다. ‘섬의 애슐리’는 먼 곳의 가상의 이야기지만, 애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성폭력 폭로가 잘못이 아닌, 이혼이 부끄럽지 않은, 1인 가구가 4인 가구만큼 많은 사회로 가고 있다. 우리는 자기만의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내 자립을 싹틔우는 이 이야기처럼.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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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 7. 7.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 기획기사 중 하나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23



사람들(men)은 남자들(men)인가?

 

케케묵은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가 수술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수술에 배정된 의사가 아이를 보더니 집도를 거부한다. “전 못 하겠어요… 쟨 내 아들이에요.”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이 문제의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아버지와 의사가 친부와 양부 관계일 수도 있고, 동성 결혼한 파트너일 수도 있는데, 흔한 답은 ‘의사가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함정은 의사가 남성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이 수수께끼는 사람들이 성별 묘사가 없을 경우 의사를 으레 남성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미국의 작가이자 편집자인 앤 패디먼(Anne Fadiman)은 <서재 결혼시키기>(지호, 2001)에 실린 에세이 “그/녀의 문제”에서 남성형 일반명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3인칭 대명사 ‘그’(he)에는 남자가 아닌 사람도 당연히 들어간다고 봐야 하나? 어떤 작가가 불특정 개인을 ‘그’라고 지칭할 때, 속으로는 여성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두었지만 편의상 생략한 것뿐일까? ‘인류’(mankind)는 여성들(womankind)을 포함하나?

 

앤 패디먼은 이러한 의문을 작가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볼 기회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작가이자 유명한 방송인이었던 클리프턴 패디먼(Clifton Fadiman)이 오래 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men”이라고 쓴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당시에 칭한 ‘사람들’(men)이 정말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지 묻는 딸에게, 클리프턴 패디먼은 솔직하게 대답한다.

 

“남성들이지. 나는 남성들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문학계를, 아니 예술적 창조의 세계 전체를 남자들의 세계로 보았지.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 그랬어. 1950년 전의 작가-아, 물론 남성 작가지- 가운데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같은 칼럼에서 앤 패디먼은 자신의 어머니 애널리 제이커비(Annalee Jacoby)의 일화도 소개한다. 종군기자였던 어머니는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H. White)와 공동 저작으로 <중국으로부터 들리는 천둥소리>(Thunder Out of China)를 펴냈다. 그런데 책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똑같이 올랐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앤 패디먼에 따르면 그 차이는 서문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해리슨 솔즈베리는 새로 나온 판본에 서문을 쓰면서, 화이트는 19번 거명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딱 한 번 거명했다.”

 

화이트를 19번 거명하는 해리슨 솔즈베리의 서문은 “결국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는 적당한 사람(man)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앤 패디먼은 이에 반발해, 이 책의 저자는 남자(man)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보낸다.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는 적당한 여자를” 대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편지를 받은 솔즈베리는 바로 수긍하고 사죄하는 답장을 한다. 앤 패디먼은 “그/녀의 문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솔즈베리에게 어떤 악의나 성차별을 할 의도가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가 여자였기 때문에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언어를 막론하고 아직도 때때로 사람들(men)은 남자들(men)만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가 아닌 사람은 자연스레 배제된다. ‘여자’와 사람의 거리는 의사와 ‘여’의사,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성별에 따라 불균등하게 쓰인다. 미(美)중년이라는 말은 어떤가. 이 말은 으레 잘생긴 중년의 남성을 뜻한다. 얼굴에 주름이 지고 옷을 단정하게 입고 연륜을 쌓은 남자들이다. 그러나 중년의 여성이 얼굴에 주름이 지고 연륜을 쌓은 모습은 좀처럼 미중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신 그녀들에겐 ‘나이가 무색한 미모’, ‘20대 뺨치는 뒤태’처럼 얼마나 젊은지 견주는 말이 칭찬으로 쓰인다. 여자라면 젊은 외모 이외에는 매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작년 5월 21일자 영국 가디언지(The Guardian)에 따르면,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의 영화배우 매기 질렌할(Maggie Gyllenhaal)은 37살에 55살인 남자배우의 연애 상대 역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는 20대 여자배우의 상대역으로 50대 남자배우가 너무 늙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의 영화 <매직 인 더 문라이트>(2014)의 주연 커플은 26살의 엠마 스톤(Emma Stone)과 54살의 콜린 퍼스(Colin Firth)가 맡았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의 나이차가 대여섯살 쯤 되는 것처럼 매끄럽게 무시한다. 일흔이 넘은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는 멋지고, 남자답고, 경험이 많은 노년의 주인공 역할로 여전히 스크린에 오르는 중이다. 나는 케이트 블란쳇(Catherine Blanchett)이 일흔이 넘을 때 그처럼 멋진 노년 주인공 이야기를 여러 편 찍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미중년”과 “미노년”의 자리는 남성에게 훨씬 관대하게 열려 있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라서 25살이 지나면 안 팔린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나는, 부끄럽지만 정말로 내가 20대에 퇴물이 되어 연애를 못 할 줄 알았다. 나이 들수록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매력이라고, 남자들에게만 당연해보였던 과정이 내게도 당연히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딸이라서 듣는 말들

 

딸로 살면서 듣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에 비하면 어머니와 딸의 위치는 남보다 더 상냥하기를, 더 착하기를 요구받는 자리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내게 심한 말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수없이 많은 충고를 들었다. ‘네가 딸이니까 먼저 애교도 부리고 사근사근하게 굴어야지’, ‘여자애가 뭐 그리 고집이 세니’, ‘딸이니까 말을 잘 들어야지’, ‘아버지가 상처가 많아서 그래. 딸인 네가 이해해라.’

 

딸이니까, 여자애니까… 참 이상하고 지긋지긋한 얘기들이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 뿐이지, 참하거나 착하거나 애교가 많은 사람이라고 정해지진 않았다. 여자가 아니라고 참하거나 착하거나 애교가 많은 사람이 아니리란 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상냥하고 착하게 굴라는 충고는 폭력에 더 쉽게 친숙해지는 남자아이들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아버지가 가족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문제이지, 딸인 내가 애교가 없는 탓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가 유별나게 폭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란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상처 입히는 언행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수용하는 분위기는 무섭다. 내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고 무서웠다고 이야기할 때 가장 싫었던 반응은, 폭력을 겪는 당사자인 내 입장을 빼놓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라고 하는 얘기, 바로 “너네 아버지도 불쌍하다”였다. 평범하고 악의 없는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강력한 말이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따라오는 “불쌍한 남자” 서사는 흔하다. “네가 화나게 해서” 두들겨 팼다는 아내폭력 이야기, “그년이 밤늦게 다녀서” 덮쳤을 뿐이라는 강간 이야기, “취업을 못 해서”, “집나간 마누라랑 닮아서”, “말대꾸를 하길래” 홧김에 저지르고 말았다는 온갖 폭력 이야기들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심지어 ‘여자들이 나하고 연애를 안 해줘서’, ‘여자들이 편하게 살아서’ 힘들다고도 한다. 반대로 그 여자들에게는 ‘네가 딸이니까’처럼 ‘네가 여자니까 알아서 조심해야지’, ‘어딜 여자가’라는 말이 돌아간다.

 

나는 그런 “불쌍한” 이야기를 보면 오히려 거기 동원되는 “괘씸한” 아내와 딸과 연인과 애꿎은 여자들을 생각한다. “불쌍한 남자” 서사가 지배적인 한 그 외의 사람들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내가 겪었듯이 자주 생략되고 삭제되기 때문이다.

 

여직원만 받는 질문들

 

직업 세계에 진입하는 여자들, 내 나이대의 여성은 ‘여직원’에게만 던져지는 질문에 답할 대비를 한다. 여자인데 야근할 수 있나, 여자인데 술은 마시나, 여자인데 왜 졸업이 늦었는가, 앞으로 결혼 계획이 있나, 결혼하면 애는 어떡할 건가.

 

나는 취업 상담과 모의 면접에서 ‘안 그래도 여자인데 너무 세보이면 안 된다’,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여서 윗선에서 싫어한다’는 지도를 받았다. 먼저 회사에 들어간 여자 선배들은 ‘면접까지 올라갔더니 여자가 나밖에 없더라’는 경험담, ‘상한선은 정말 스물다섯이더라’는 푸념, ‘애는 꼭 어머니가 봐주신다고 답하고 육아휴직 얘기는 생각도 말라’는 충고를 주고받았다. 결혼하는 여직원에게 “우리 회사에는 여자가 결혼하고 근무한 선례가 없다”며 퇴사하라고 압박하는 일은 놀랍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여직원에게 주로 붙는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은 진짜 단정함을 뜻하지 않는다. 작년 12월 어느 마케팅 회사는 마케팅/기획 분야에서 인턴을 구하는 광고에 자격 요건으로 “C컵 이상”, “미모와 지성을 겸비”를 내세웠다. 모집 및 채용시 성별로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다. 게다가 마케팅 인턴이 맡는 일은 섹스어필이 아니다. C컵 운운은 결국 여성을 같이 일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것이다.

 

일하는 20-30대 여성들을 인터뷰해서 기록한 한국여성민우회의 <나만 힘든가?>는 직업 세계에서 여자라서 겪는 일들이 ‘나만’ 겪는 일이 아님을, 아주 흔하고 아주 강력해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정도임을 보여주는 책자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다.

 

“첫 직장에서는 업무 평가를 희한하게 했던 게, 팀 별로 상대평가를 했어요. 팀 인원이 대여섯 명인데 그 안에서 A, B, C, D, E 이렇게 나오니까 결국 한 명은 E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유 없이 하위로 평가되는 여직원이 많았어요. (…) 남자는 처자식이 있어서 빨리 승진을 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애당초 능력이랑 상관없이 남자부터 승진이 되게 되어있었어요.”

 

반대로 여직원에게 향하는 결혼계획 질문은 승진보다는 퇴사 여부를 묻는 쪽에 가깝다. “남자는 처자식이 있어서” 승진이 필요하다는 말은 흔하지만,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는 등 부양가족이 있거나 1인가구 가장인 여자들의 필요는 잘 고려되지 않는다. 여자의 자리는 집, 여자의 본분은 내조라는 생각이 유지되는 한 직장에 있는 여성들은 임시 일꾼이나 예외 사례 취급을 받는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6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여자인 내게 매겨질 월급 평균은 남자의 62.8%다. 그게 현재 한국 여성노동자의 평균값이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전문 직종이라도 ‘그래봤자 여자’라는 평가절하에서 자유롭지 않다. 예전에 들은 여성주의 수업에서는 ‘남자 교수는 교수님으로 칭하면서 여자 교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그런 질문이 나오는 이유를 안다. 예전에 내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었던 다른 학과 남자 교수가 내 전공학과에 대해 “여자 교수가 많으냐”고 묻더니, 바로 “예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유명하냐”든가 “프로젝트는 잘 따오냐” 같은 질문이었다면 차라리 대답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전공학과의 교수진에 관한 말 중 “예쁘냐”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아마 그분에게는 “교수”와 “여교수”는 다른 범주였을 것이다. 내가 “여교수”들의 연구 성과나 교수법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늘 싸워왔다”

 

미국의 SF작가 캐머런 헐리(Kameron Hurley)는 <우리는 늘 싸워 왔다: ‘여자들, 가축들, 노예들’ 내러티브에 저항하기>라는 글에서, 알래스카 오지 비행사들을 다룬 리얼리티 쇼를 본 이야기를 한다. 모든 비행사에게 소개가 붙었지만 그중 유일한 여성비행사는 다른 비행사의 여자친구라고만 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야 그녀에게 제대로 된 소개가 붙었는데, 그녀는 전 남자친구보다 경력이 네 배 길고 사냥, 낚시, 암벽등반에도 능한 에이스 비행사였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경험담도 이와 비슷하다.

 

“판사 시절, 어떤 남성이 내게 ‘마거릿 대처 수상은 한 나라의 수상인데도 매일 남편의 아침 식사를 차려준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라고 말했었다. 대처 수상이 실제로 매일 아침 식사를 차리는지 않는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대처 수상이 훌륭한지 아닌지를 그런 기준으로 따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실 그 말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맞벌이 여성들이 대처 수상만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말이었을까? 당시 나는 매일 남편과 아이들은 물론 시부모님의 아침 식사까지 차려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에 대적할 생각도 하지 않고(실은 일일이 대꾸할 기운이 없어서) 웃어 넘겨버렸었다.” -김영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2016) 추천의 말 중에서

 

여성주의는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고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한 질문”(정희진 “그 남자의 여자들, 제2의 성” <한겨레> 2015. 7. 3)이다. 평범한 말, 그냥 하는 이야기들이 내게 끊임없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그런 언어 속에서 실제 여자들, “말하고 설치고 생각하는” 여자들, “여자에겐 불가능”하다는 일을 이미 해낸 여자들은 지워져버린다.

 

한국에서 ‘여자다움’을 요구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는 ‘여자는 사람이 아니냐’고 되묻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인 내가 무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를 대등하게,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말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렇듯, 말을 바꾼다고 그 속에 든 차별과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나하나 바꾸는 것이 곧 차별과 고정관념에 저항하고 변화를 꾀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여자인 사람들에게 의사나 교수나 동료나 사람이 아니라 여자이기만 하라는 말들 말이다.

 

※ 가디언지 기사 보기: Ben Child, “Maggie Gyllenhaal: At 37 I was 'too old' for role opposite 55-year-old man”, <The Guardian>(2015. 5. 21.) http://me2.do/5U7oBriG

 

※ 캐머런 헐리 <우리는 늘 싸워 왔다>: Kameron Hurley, <We Have Always Fought: Challenging the ‘Women, Cattle and Slaves’ Narrative>(2013) http://me2.do/FkceNjne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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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여성 살해'사건 관련 긴급 집담회]
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

2016년 5월 26일(목) 오후 7시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
주최: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새움터,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장애인연합,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후원: 한국여성재단

발제문 다운로드 링크

* 들으면서 적었으므로 본의 아니게 생략된 부분이나 바뀐 표현이 있습니다.
* 현장의 발제 중심으로 적되 발제문을 참고해 보충했습니다.
* 소제목은 임의로 나눈 것입니다.


사회: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인삿말 및 소개 (생략)

발표

1. 김수아: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보편성과 특수성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온라인 문화 중심으로 연구.

여성혐오?
- 여자라면 환장하는데 무슨 여성혐오냐고. 이게 남초 커뮤니티에서 많이 본 말.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환장한다'는 거. 그 문제를 모르는 거죠. 지금은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제를 구성하고 성차별주의를 구성하는 기초로서의 여성혐오. 남성상을 완성하기 위해 여성을 멸시하는 구조.
- 누스바움은 여성혐오의 핵심을 대상화라고 봤다. 여성을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
- 물론 최근에야 나타난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의 역사와 함께. 그리고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동시대에 다른 곳에서도. 잡지의 <김치녀 백년사>에 실렸던 글들. "이대생은 하이힐을 벗고 단화를 신으라"고 시위하던 게, 지금은 "스타벅스에 가는 여자가 된장녀인 이유"로 올라온다.
- 온라인 여성혐오를 끝내자는 캠페인을 하는 영국 등의 단체 활동을 보면. 주로 강간 위협으로 나타남. 여성혐오는 성에 기초한 폭력이 만연하게 만드는 배경. 그리고 이에 문제를 못 느끼게 하는 정서적 배경.
- 이 정서라는 게, 단순 감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생활의 차이로 이어진다. 화장실, 도로 등 물리적 공간은 어느 성에게나 동등하지만 생활세계에서는 다름. 차이가 집합적으로 모임으로써 남성의 생활세계와 여성의 생활세계는 달라진다. 구조가 체화되어 나타나는 여성혐오가 실제 생활세계를 침범할 뿐만 아니라 생명마저 침해하는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원인과 문제점 1. 여성의 시민권 부정
- 기본적인 원인은 가부장제적 헤게모니다. 경제 위기는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이걸 남성만의 위기라든가 여성혐오 원인이라고 할 수 없음. 헤게모니의 붕괴에 위협감을 느끼는 것.
- 구체적으로
1) 여성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 자격이 없는데 떼를 쓴다는 생각이 있었음. 여성의 권리 주장은 부당하다고.
2)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부정, 성적 시민권을 부정. 성녀/창녀 이분법. 유학 다녀온 여자는 더럽다.
3) 남성의 피해자성을 계속 구성하려고 하는 것. 피해자는 남자 뿐이다. 역차별. 여자를 못 만나서 여성혐오한다고 함. "아다 스웩". 이성애성과 관련한 피해자성이 온라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을 획득, 차지하지 못해서 나는 이등 남성이 되었다는 호소. 그리고 그 원인을 경쟁 등이 아니라 나를 부정한 여성에게 묻는다.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 십대들도 똑같이 이런 말 하고.

원인과 문제점 2. 인터넷, 저널리즘.
- 여성혐오가 격해지는 원인을 1) 인터넷 문화 2) 저널리즘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강화, 재생산. 사회적 무의식의 집단화, 가시화.
- 구체적으로
1) 저널리즘은 어떤 의견이 중요한지, 우리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서는 어디에 귀기울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현재 언론은 여성혐오와 관련해서 책임 있는 주장이나 들어야 하는 의견을 선별하기는커녕 이를 다른 것과 동등한 의견처럼 다룬다. 그래서 반대쪽(김치녀 서사 등)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실제로는 동등한 상태가 아닌데도 마치 동등한 주체들이 갈등/대립하는 것처럼 보도해서('여혐'과 '남혐') 똑같은 거라고 만들어버림.
- 그리고 항상 네티즌 의견을 반영한다. 근데 이걸 분석하진 않음. 어떤 배경의 누군지 전혀 모른다. 네티즌을 인용하면서 그게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나오지 않은 채, 동등한 의견인 것처럼. 이게 정당한 것처럼. 형식적 객관주의.
(여성혐오는) 언론이 키워준 것이나 다름없다.
2) 인터넷. 집단국가 현상 심해짐. 의견 동질화 현상. 집단 극화. '혐오'로 묶인 혐오집단 생김.
그런데 여성혐오는 농담으로 유통됨. 재미있는 게 중요하고, 재미있으니까 유통된다. 패러디, 유머의 형태로 폭력과 차별이 퍼짐. 이게 재미있는 거라고 교육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이 왜 그러는진 모르겠는데 한국 말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 페이스북은 차별이나 여성혐오 인종차별 등에 대해 매우 미온적으로 대처해왔음. 재미있다고만 하면 제재하지 않았다. 재미있고, 그러니까 즐겁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화내면 이상한 일로 만듦.
근데 유머 수준이 아님. '오빠 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 패러디 '오 빠따 뽑았다 널 때리러 가'. 이게 뭘로 쓰이겠어요. 여성을 공격하겠다는 뜻으로 쓰임. 그럼에도 유머로 통해서 폭력을 정당하게, 사소하게, 당연하게. 그리고 실제 폭력으로 이어지는 데 걸림돌이 없게.

연대
- 피씨통신 시절, 여성이 20%던 시절에도 온라인은 여성혐오의 온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본격화된 건 군가산점제 폐지 논란 이후. 여성 개개인에 대한 공격이 정의의 이름으로 남성에 의해 실현됐다. 그런데 페이스북은 실명제가 가능하고 개인의 네트워크가 공개된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위험하고 생활세계를 침범하는 수준에 이름. 더군다나 이들을 계속 감시한다. 여성에 대해 글 쓰는 페이지를 감시하고 공격하고, 여기에 우호적인 댓글 다는 사람 페이지로 들어가서 공격 쪽지를 날리고, 이렇게 네트워크를 타고 옮겨다니면서. 위협을 퍼뜨리고 강화한다는 점.
- 온라인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조차. 여성들은 세게 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경우도 많은데. 조근조근 말하는 사람들도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성 집단 전체의 발화를 막는 효과. 이를 어떻게 혼자 싸우지 않게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 연대를 통해 생활 세계의 침해를 막아야. 고립되어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고.


2. 이나영: '살아남은'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 혐오, 미쏘지니, 젠더폭력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선생님 막말 멋있어요

제가 페북을 올해 1월 초부터 시작했어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때문에 빡쳐서, 안 하면 안 되겠다 하고. 덕분에 이 자리에 왔습니다.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어. 저희 페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발제문 제목은 복잡한데,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제가 오기 10분 전까지 써서 말과 내용이 다를 수 있다.

무시당했다는 반응은 무시하던 사람의 것
- 남자의 살해 동기는 "무시당했다는 느낌". 굴욕감. 그건 대등하지 않은 사람에게 갖는 것이다. 아버지들은 어머니가 의사표현을 하면 '뭘 안다고' '날 무시해서 그래'라고 쉽게 언어화하고 대응함. 그러나 자기 아버지, 상사, 선배에게 당할 때는 무시당했다고 공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 무시당했다, 굴욕감, 대응. 평소에 여자를 무시하던 사람들의 반응이다. 여성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여성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낀다. 결국 '여자들이 날 무시해서'는 '이것들이 감히 나 남자를 무시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는 표현. 우월적 지위의 상징이자 도구.

여성혐오 현상
- 강남역 출구 앞 길거리에 새겨진, 성폭력에 대한 호소들. 여성들 자신의 기억을 상기하는 것이자 해석의 과정이며, 자기 미래에 닥칠 죽음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여자라서 멸시당하고 강간당하고 죽어왔지만 표현되지 못한, 표현하지 못한 '내'가 소환되는 상황이다.
- 페미사이드. 젠더폭력. 예외적인 게 아니라 너무나 보편적이고, 이 불편한 구조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왔다는 것. 영화 <곡성> 감독의 <추격자>. 사이코패스의 행위로 만들어서 범죄를 탈맥락화, 탈역사화.
- 경찰, 언론의 상당수는 묻지마 살인이라고 이름붙임. 묻지마 살인인가 여성혐오 범죄인가. 가해자가 조현병이라는 것과 여성혐오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성혐오는 최근의 일인가. 이건 젠더전쟁인가. 이런 게 지난 일주일 간 언론에서 무수히 받았던 질문입니다. 오늘도 똑같은 질문을 받아서, "입닥치고 여기 와라"고 말했습니다. (일동 박수)
- 2012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토론회. 당시 여성,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사건들. 예외적인 일들로 놓지 말라고. 구조적 변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을 차단하고,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예측 불가능한' 피해라고 암시함으로써, '일부' '이상한' 남성에게서 안전하기 위한 '일반' 남성들의 품으로 의존하도록. 무력감. 불안감. 결국 남성과의 정치적 (협상) 문제로 환원된다. 일시적인 것도 우연도 아님. 오래된 분석.

여성혐오, 젠더폭력, 남성의 자기분열
1) 잘못된 문제설정
- 남성 우월주의(male supremacy), 남성중심 사회. 젠더 폭력의 징후적 표출이 핵심.
- 그럼 혐오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되는가. misogyny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제가 참고한 책에서는 sexism과 misogyny를 같이 놓고 가끔 male supremacy를 언급했다. misogyny와 male supremacy는 공통적으로 남성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 여성혐오라는 말은 일본 번역어이고 일본 학자가 이해한 방식임. 그런데 한국에도.
- 강신명 경찰청장의 주장. 대책으로 3개월간 특별 치안, 정신질환자 특별 관리하겠다. "오빠 국가"와 보호대상으로서의 여성 이미지, 그리고 질병에 낙인 찍기를 이야기함. 그러면 현재의 차별적 구조와 위장적 평화가 유지된다. 가부장적 국가의 지위는 유지되겠죠. 무엇이 사건의 본질인지 모르려고 하면서 동시에 원인을 재생산, 강화함. 그래서 이걸 성차별 사회의 자기분열적 칼춤이라고 표현하겠다. 정신분열 환자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이 정신분열인 것. 제가 만든 말은 아니고요. 성차별적 위계와 맞물리면서 분열적으로 행동한다는 건 오래된 분석.

2) 혐오: hate
- 혐오가 꼭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님. '난 여성 안 싫어하는데?'가 여성혐오 아닌 게 아님. 다양한 양태가 포함.
-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 낸시 초도로우. 생물학적 공격성은 남녀 차이 별로 없음. 증오는 구성되는 것. 남성의 혐오(hate)와 굴욕감은 여성혐오 문화(misogyny)를 통해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굴욕감 → 중오  폭력행위.
- 건강은 주체는 자아(self)와 대상(other)으로 구성. 그런데 젠더위계, 성차별, 여성혐오 사회에서 남성은 자아와 대상을 분리해서 남성성 주체로. 헤게모니에 맞는 '남자다운' 남자를 '좋은 것'으로 놓고 동일시하면서, '나쁜 것'은 여성성으로 투사하고 (자신과) 분리한다. 남성다움은 여성답지 않은 것. 나쁜 것은 여성다운 것이고, 여성다운 것은 나쁜 것. 그래서 대상other은 자기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형성됨. 따라서 주체인 자신을 분열증적으로 내면화한다. 자아든 대상이든 자기인데.
- 피해의식. '나쁜 것'인 대상이 '좋은 것'만 분리해낸 자아를 공격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대상을 공격하려 한다. 증오는 결국 방어기제로. 증오가 심할수록 자아/대상의 분열이 극단적으로 배가된다. 특히 성인 남성은 수치를 당했다고 느낄 때, 아니면 다른 남성에게 패배했다고 느낄 때, 이걸 자아(실제로는 자기가 보호하고 싶은 자아의 한 요소)에 대한 도전으로 느끼고 극단적인 폭력으로 대응한다.
- 이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님. 미국 9.11 테러에 반응한 남성들의 극단적인 모습을 분석한 결과 문화적 집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자기 집단에 대한 굴욕감으로 느끼고 집단적 행동. '그들'과 '우리'를 분리하여 정당화 과정을 거친 후, 자신이 (자기 때문에) 느낀 위협감을 타자/대상/그들을 실제로 공격하는 것으로 표출. '남성성'의 폭력.

3) 혐오: disgust
- 마사 누스바움은 증오hate보다는 역겨움disgust을 분석. 더럽다는 것. 이게 한국에서 여성에게 많이 하는 일이다.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는 더럽다. 그런데 이 더럽다는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 상대적 약자인 타자에게 혐오를 구현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배제하고 주변화한다. 하지만 타자에게 구현된 혐오는 사실 그가 날마다 대면하기 힘들어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문제다. 그래서 혐오는 결국 자기 자신을 감추는 자기기만, 자기분열적 기제.
- 자아와 대상은 주체를 구성하는 한 쌍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공격은 자아에 대한 공격이 된다. 자기가 투사하고 자기가 분리했으므로. 주체는 내파됨. 자기모순에 빠진 슬픈 남성성. 우리가 어떻게 구해줄 수는 없고, 그들 스스로 비대칭적이고 위계적인 젠더 질서에서 형성된 '남성성'/'여성성'을 극복해야 치유될 수 있다. 안됐죠.
- 그래서 이번 사건에서 보인 남성들의 격렬한 반응은 그 자체로 성차별 사회의 징후. 헤게모니 남성성과 동일시하려는 자아 유지 전략이자 방어기제인데, 실패함. 우월적 남성에게 인정받아야 살 수 있는 슬픈 처지라는 반증이기도. 그러나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야기한 공범적 사회 구조를 보지 못하는, 보지 않으려는 바로 그 모습이 또 그런 사회 구조의 하층부를 공고히 한다. 결국 그들이 보호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는 그들이 적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헤게모니 남성성 혹은 위계구조의 최상위층 남성들인 셈인데. 젠더 위계가 자길 위한 특권이라고 믿고 과잉 자기방어 하니까 결국 자아의 내파.

4) 젠더폭력, 페미사이드
- 페미니즘은 오래 전부터 '젠더폭력' 명명. 젠더폭력이란 "여성들이 특히 많이 경험하는 폭력의 형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나 여아가 피해자가 되는 폭력의 형태일 뿐만 아니라, 성별위계질서에서 배태한 폭력이자 남성(성)의 권력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기제가 되는 폭력"이다. 이 사건이 젠더폭력인 이유는 성차별적 사회에서 구성된 '남성성/여성성의 위게적인 젠더 질서(물리적이든 상징적이든)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폭력'이기 때문. 젠더폭력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말이지만, 그럼에도 폭력의 구성 과정과 연계를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개념이기도.
- 여성살해(femicide). 다이애나 러셀은 1992년에 책 [여성 살해: 여성 살해의 정치학]에서 '여성 살해'를 두고 범죄심리학이 '성'을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음. 페미사이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혐오적 살해다. 카푸티(Caputi)는 여성살해가 정신이상자, 일탈자의 일부 행위가 아니라 가부장적 역할, 가치, 욕구, 힘의 규칙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다음 단계라고.
2012년에 러셀은, 워먼이 아니라 페미니티를 강조하며(꼭 여성의 몸이어야 당하는 건 아니므로), 피메일이라고 살해하는 남성의 범죄를 페미사이드라고 다시 못박음. 성차별 구조를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는 페미사이드라는 말은 거부됨. 중립적으로 보이는 제노사이드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경시, 무시를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음. 여성 스스로 이건 페미사이드다, 라며, 그리고 다층적 저항을 하는데 이를 무시하는 남성의 지배 구조.

한국, 여성혐오라 이름짓기
- 기자들이 많이 묻는다. 왜 여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냐.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 이전에는 '순결한 여성'에 맞는 '절대적 피해자'만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고. 젠더폭력의 심각성이 드러나지 않음. 여성동일시 실패. 그러나 지금은 '일반 여성'의 문제임이 드러남. 여성으롯 갖게 된 불안, 공포, 경험을 돌아보고 가시화. 다른 여성들의 경험에 공감하는 청중의 탄생.
- 광우병 사건 때 여성들이 많이 나오셨잖아요. 근데 저는 이번이 굉장히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고. 이 사건을 읽을 수 있는 공감대가 드디어 형성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래된 여성운동의 토대가 있던 덕이라고 당연히 인정합니다. 이건 인정해야죠. 이제 여자도 공부는 하잖아요. 예전에는 여자는 학교도 못 갔는데. 이제 대학까지는 평등하게 간다. 근데 대학과 대학 이후에 불평등과 마주하고 차별을 체감하고. 이를 어떻게 이름붙여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온라인에서 메갈리아 등으로 발화.
누가 메갈리아 이게 페미니스트냐고 물었는데, 아니 그렇게 묻는 너는 페미니스트니? 페미니스트는 되어가는 것이다. 단계는 다르지만 페미니스트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한테 여성학 배우는 거 아니잖아요. 자기가 스스로 배우고 경험하면서, 지식의 육화를. 육화된 지식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어요. 공사가 분리된 게 아님(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살면서 느낀 것들이 형성. 나만 무시당한 게 아니구나, 쟤도 무시당했구나. 그리고 온라인에서 동의해주는 사람들 있음. 부당함의 영역이 확장됨. 혼자 당하는 부당함이 아니라 여성이 당하는 부당함. 그건 부정의라고 이해하게 되고. 정의의 개념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생긴다.
- 정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제도화된 합리적 언어의 영역에서는 이게 부정의라는 이름이 없었음. 없는 일이었음.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여성혐오 범죄"), 대안적 공론장을 구성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객관성 자연스러움 등에 변화를 야기하고. 제도화된 것들에 반성과 비판으로 변화를 유도한다. 새 프레이밍. 수많은 대중들에게 불편함과 '경기'를 유발함으로써. 자기성찰적 집단의 재구성.
아 좀 불편해봐. 그리고 왜 불편한지 생각해봐. 너도 느껴봐야 할 거 아냐, 우린 그렇게 자연스럽게 당하고 살았는데. 
- 이렇게 부정의를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공적으로 명명되는 부정의의 영역에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는 데 성공한다면, 공적 이성의 프로토콜도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함'이 변할 것. 물론 불편하고 어렵고 주류 페미니즘과 갈등할 수도 있고... 하지만 진보성 등등을 의심하지 말라.

마무리
- "여성혐오 범죄"로 이름지을 때 예상되는 문제. 이게 범죄라는 프레임이잖아요. 그런데 프레임을 가지면 법적 영역에 갇히는 한계가 있다. 범죄라고 하면 당장 사회적 반응을 일으키긴 함. 경찰도 서울시도 (이상하긴 하지만) 당장 정책을 내놓고. 그러나 범죄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가면, 해결가능성이 경찰/법원/오빠들 등 구조적 지배적 남성적 집단의 손에 놓인다. 그러면 이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비효율적이다, 돈 많이 든다, 안 된다 등등으로 가로막힐 우려가 있다. 본질적인 개선 시도에는 부정적 판단이 내려짐.
- 그럼에도. 조직화된 여성들에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 "여성혐오에 기반한 살인"이라고 정의하기 시작한 시민의 존재. 죽인 자와 죽일 자, 죽일 수 있는 자들과 / 죽은 자와 죽을 자, 죽을 수 있는 자들의 위치를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여성들이 당하는 직접적, 가시적인 폭력 & 비가시적인 구조적, 상징적 폭력.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불평등한 젠더 질서. 이런 것들을 대중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 그렇게 '여성혐오'라는 본질을 지적함으로써, 단선적인 대책이 아니라 성차별적 남성 중심 사회구조 전반과 인식 전반의 변화를 실현. 현실에서.


3. 홍성수: 혐오표현과 혐오범죄: 법개념과 사회적 의미, 법규제와 사회적 대응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저는 3년 전부터 혐오표현에 대해 연구해왔고요. 혐오표현이라는 문제가 혐오범죄라는 또다른 형태의 문제로 이어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혐오범죄에 관심을 갖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혐오표현과 증오범죄
- 저는 이 사건이 났을 때 놀랐던 부분이, 한국 사회는 차별과 혐오표현이 만연해 있는 상황이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잠재된 폭탄 같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관련해서 먼저 이슈화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장 위험한 건 이주노동자 쪽이라고 생각했고.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도 무시를 넘어 구체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고.
- 혐오표현(hate speech): 장애 인종 성적지향 성별 성정체성 등등 소수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 조롱 위협하거나, 차별과 폭력 적대을 정당화하거나 선동하는 것. 혐오표현의 대상은 소수자. 개인이 아니라 소수자 집단 전체에 대한 차별 폭력 적대를 조장한다.
- 증오범죄(hate crime): 저는 개인적으로 증오범죄라는 말이 더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혐오표현과 마찬가지로 소수자 속성에 근거한 적대 또는 편견을 동기로 하는 범죄. 새로운 범죄는 아니고 기존의 일반적인 유형의 범죄를 저지르면서, 그 동기가 편견에 기반한 형태로 나타남. 편견이 동기일 때 가중처벌하는 게 증오범죄다. 그러니 새로운 건 아니고, 동기가 더 나쁘다는 이유로 가중처벌되는 걸 흔히 증오범죄라 부르고 있다.
- 증오범죄 미국 2014년 FBI 통계. 미국 전역에서 5462건. 인종은 47%. 젠더는 0.6%. 영국 2015년 정부 통계는 55,528건. 젠더는 범주에 없어서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두드러지지 않음. (젠더로 폭발한) 한국은 좀 특수성이 있지 않을까.
- 보편적으로 인종 등등등이 증오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소수자 속성으로 보긴 하는데, 개별 국가마다 교육, 정치, 이데올로기 등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고정된 건 아님. 한국도 성별이나 지역 등이 동기로 나타남.
- 복합 동기도 가능하다. 여러 소수자의 특성을 동시에 갖춘 경우. 차별행위도 복합적으로 가능하거든요. 여성+성소수자에 대한 고용 차별 등. 범죄도 똑같이 복합적인 동기로 가능함.
- 사람에 대해서만 행하는 게 아니고 사물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얼마 전 서울대의 성소수자 현수막 훼손 사건. 법적으로는 손괴죄에 해당되는데 그 동기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면 증오범죄에 해당한다.
- "증오범죄는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만연한 편견의 폭력적 발현이다."(OSCE 보고서)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 극단적인 형태가 혐오표현, 증오범죄. 따라서 혐오표현과 증오범죄는 사회적으로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다. 이걸 단계론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면
예) 올포트 척도: 부정적 발언 → 기피 → 차별 → 물리적 공격 → 제노사이드/ 절멸
예2) 제노사이드 8단계론: 범주화, 상징화,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 준비, 절멸, 부인
예3) 페이스북에 돌던 혐오의 피라미드론: 고정관념 등 편견 → 괴롭힘/놀림 등 개인적인 편견행위 → 고용 교육 등의 영역에서 차별 → 혐오범죄 → 제노사이드
어쨌든 기본적인 편견이 기피, 차별, 물리적 폭력, 제노사이드로 이어진다는 가능성. 혐오표현-차별행위-증오범죄의 연쇄 구조. 이 가능성은 이미 여러 번 학자들이 입증한 바 있다. 동일한 배경이라는 걸 보여준다.
- 차이점: 증오범죄는 기존의 범죄론에서 양형요소, 가중처벌 요소로 고려됨. 기존 범죄를 가중처벌. 반대로 혐오표현은 새로운 범죄유형(혹은 차별유형)이고 새 입법 필요.

여성혐오의 특수성
- '여성' 혐오표현과 '여성' 증오범죄를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1) 일반적인 혐오표현은 소수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형태로 드러남. 또는 사회적 지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함. 이주노동자는 너네 나라에 가라, 성소수자는 치료대상이다 등. 하지만 여성혐오는 특이하게 정체성을 부정하기보다는 '일부 여성'의 속성으로 몰아가려고 함.
2) 여성 집단을 분리하려고 한다. 성소수자 혐오자는 다 혐오함. 근데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다 문제인 게 아니라 '일부 여성'만이 문제라고 한다. 집단으로서의 여성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는 차이.
3) 양적 다수성. 여성은 인구 구성으로는 소수자가 아님.
4) 내부의 이질성. 여성을 집단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보기 어려워함.

- 그러나 이번 사건의 징후는 다른 소수자에 대한 증오범죄 징후와 별로 다르지 않게 나타남. 일반적인 증오범죄의 중요한 표지는 소속 구성원들이 다 자기 일로 느낀다는 것.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들 자신의 일로 느낀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등. 흑인 대상 범죄에 흑인 공동체 등에서 보이던 표현. 나도 흑인인데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반응한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활성화하고 집단 간 갈등 격화 등이 나타남.
여성들도 이렇게 집단적 정체성이 공고한 소수자 집단에게 나타나는 파급효과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성은 이미 소수자로서의 지위는 공고했던 게 아닐까. 여러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던,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집단적 정체성이 있냐는 의심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증오범죄의 의의
- 간접적 원인: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적대, 어려운 경제상황, 소수자 희생자화
- 직접적 원인: (가해자의) 동료로 승인받고자 하는 질투, 욕망, 적개심 / 피해자 개인에게는 별 감정 없지만 그 소속 집단을 적대 / 심리적, 가정적, 사회적 요인
- 해악
1) 평등이념 파괴. 증오범죄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 집단을 두고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집단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부분.
2) 피해자들에게도 막대한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 그냥 개인적으로 폭행을 당한 것과 자기가 소수자라서 폭행을 당한 건 심리적 피해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남.
3) 소속 집단 전체에 공포심을 야기한다. 우연히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4) 사회 안정과 공공질서에 대한 불안을 집단적으로 야기한다. 집단 간 긴장을 유발하며 더 많은 불안을 낳음.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측면. 여성만 그런 건 아님.
5) 잔혹하다. 편견에 기초한 범죄다보니 일반적으로 잔혹하게 나타남.
6) 일베 같은 집단이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가해 집단이 있는 경우가 많다. 흑인 증오범죄 보면 흑인 차별 집단이 있다. 그래서 추가적인 범죄로 이어질 위험 있음. 그리고 범죄 저지른 사람이 영웅시된다거나, 또다른 영웅을 만들고/되고 싶어하는 모습.

증오범죄 판단 방법
- '편견' 때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 증오범죄 판단을 위해 심리분석도 하고 프로파일링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범죄 전후의 정황이다. 범죄 자체의 속성. 대상을 타겟팅한다든가. 가해자가 선언문 작성하는 경우. 주변인에게 평소에 어떤 말을 했는가. 사후에 자기 행위를 뭐라고 평하는가.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느냐. 어느 사이트를 다녔는가. 증오범죄 규정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이런 식으로 무엇으로 증오범죄를 규정하느냐가 구체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다.
- 지금 전문가들 혐오범죄 아니라고 하는데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상태에서는 단언할 수 없다. 경찰 발표도 성급했다. 가해자의 정신감정을 한 것도 아니고, 범죄 수사가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건데. 이런 것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혐오와 상관이 없다고 단언해버렸다. 
- 성급하다고 생각한 이유 두번째. 경찰은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단언을 한 건가. 알 수 없음. 그 기준이 검증되고 합의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증오범죄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다고 한다면 거기까진 이해하겠는데, 우리나라에 '증오범죄 없었다'고 단언하는 건 좀.

증오범죄법 제정
- 그럼 다른 나라에서는 왜 증오범죄 법을 만들고 있는가.
1) 실천적 의의: 사회적 인식 제고. 수사기관이나 법원 등에 이 문제에 경각심, 인식 개선과 실무능력 제고. 관련해서 범죄 통계로 잡을 수 있게 되고, 국가 공식 통계로 잡아서 조사하고 보고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차별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여준다. 증오범죄의 가시성 고취.
2) 이론적 의의: 행위가 비난 가능성이 더 크고.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에 해악을 초래하기 때문에 피해도 크다. 그래서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주장.
3) 국제법적 근거: 인종차별철폐협약 4조(인종차별적 폭력 금지)

증오범죄법 쟁점사항
1) 특정 소수자 대상 범죄만 따로 떼어내는 게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음. 특정한 집단 대상의 범죄만 가중처벌하는 게 차별이 될 수 있다. 가해자도 소수집단에 속한 경우 등.
2) 실효성 측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의문.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니까. 가해자 입장에서는 법이 따로 있다고 해서 주저할 요소가 없음. 그냥 약간 가중될 뿐. 가해자가 범행 전에 위축될 거라 기대하기 어려움. 경찰 조사도 마찬가지. 증오범죄라고 더 열심히 수사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3) 법치국가 원칙과 충돌 우려. 법치국가에 대한 환상. 범죄자의 심정을 기준으로 처벌하는 게 옳은가. 그리고 동기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의 어려움.
4) 증오범죄를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감시국가, 예방국가가 될 우려. 결국 경찰의 예방 등을 강화함으로써 감시사회를 만들 거라는 비판. 압수수색, 도청, 감청, 시민과 '적'의 분리. 우리 경찰은 이론에 나온 걸 전부 다 하고 있죠. 씨씨티비 확충 등의 경찰 예방 활동.
- 따라서 증오범죄 법에 대한 환상은 곤란하다. 그리고 문제점도 우려.

결론
- 증오범죄 법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 상징은 나쁘지 않음. 의지를 갖고 그 상징으로 추진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 실질적 범죄 예방 효과보다는 국가/공동체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 가시화. 의제화.
일단 정치지도자가 나서서 안심을 시켜 줘야 돼요. 여성혐오 맥락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는 정도만이라도 인정한다든가. 가만히 있지 않고 노력하겠다고 한다든가. 그런데 대통령은커녕 여성가족부조차도 안 함. '여성혐오 범죄는 아닌 것 같다' 이 정도만으로 접근한다는 게. 코멘트가 립서비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거기서 출발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증오범죄'법'만 만든다는 건 너무 부차적인 문제에요.
-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에는 이런 점도. 혐오에 기반한 게 주된 동기라는 게 확실해야 함. 범죄자 가중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치국가 원칙들이 적용되기 때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 유리하게 해야 한다든가 등등. 그래서 형사법적 관점에서 "증오범죄"라고 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함.
그런데 언어가, 꼭 법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게다가 우린 법도 없어요. "여성혐오 범죄"를 규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다면, "여성혐오'적' 범죄" (일동 웃음), "여성혐오라는 맥락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범죄"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성혐오 범죄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락이 있다"든가. 이런 건 얼마든지 충돌하지 않고 가능하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담론으로 말하는 건 가능하지 않은가. 
범죄학적 측면에서 "증오범죄" 아닐 수 있어도, 범죄 발생 후의 사회적 반응과 그 맥락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전함. 오히려 사회적 반응은 증오범죄와 매우 유사했다는 점. 그러므로 경찰이 증오범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이 사건의 증오범죄적 측면에 주목하는 입장은 양립 가능하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증오범죄다"라고 말하며 사회적 담론을 구성하는 것도 가능.
혐오'적'표현, 증오'적'범죄 등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치안대책 등은 불충분. 치안대책이나 정신질환자에 관한 대책만으로 문제해결의 방향을 제한하려는 데 맞서야 함.
- 그런 점에서 봤을 때 굳이 법적인 대응을 한다면, 증오범죄법보다는 차별금지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증오범죄법은 앞서 말한 대로 문제도 있고, 제한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건 차별이므로. 차별을 규제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우선해야 할 것이 아닐지.

* 19대 국회 법안 제출 현황

- 차별금지법안: 차별금지법안(최원식의원 등 12인, 2013.2.20., 철회), 차별금지법안(김한길의원 등 51인, 2013.2.12, 철회), 차별금지법안(김재연의원 등 10인, 2012.11.06.)
- 혐오표현금지법: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안효대의원 대표발의, 2013.6.20.) “인종 및 출생지역 등을 이유로 공연히 사람을 혐오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증오범죄가중처벌법: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이종걸의원 대표발의, 2013.11.29.)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인종,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한 개인적·사회적 편견에 의하여 생성된 혐오감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인, 상해, 폭행, 재물손괴, 명예훼손, 모욕죄를 범한 경우 가중처벌.


4. 이미경: 화장실법 개정이 아니라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우리 여성들은 '두려움'을 넘어 '연대'하며 힘을 낼 것.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저는 홍성수 교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받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여성혐오 범죄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연대하겠다는 말씀을.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 강남역 추모의 글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여자로 사는 것이 두렵고 겁이 났습니다. 아무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을 때는요. 하지만 이 곳에서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을 보고 희망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설치고 떠들겠습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 이상 약자이지 않도록. 여자라서 자랑스럽습니다."
- 특별한 일이 아님. 저도 늘상 봐왔고요. 특정 사건이라는 비커 안에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 일상 안에 있는 것.
어제 외국에서 온 분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한국은 OECD 가입국이고 여성대통령이 있고 '4대악'이 있고 케이팝과 한류가 '반짝반짝'하는데. 어떻게, 여성혐오라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근데 실제 소수자들은 일상적으로 혐오 폭력 차별 경험한다.
- 전국 성폭력상담소 전국 150여개. 연간 상담 9만여 건. 모두 여성혐오 차별 폭력 등 여성 인권침해 사건.
- 이렇게 피해자를 차별하고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말을 하고 피해를 호소하고 신고하고 고소하고 치유의 여정에 선다. 분투하며 살아내고 있구나 하고 감동.
-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 학자들. 정치 언론 종교 분들. 많이 노력하셔서 우리 사회가 변화해오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저는 그동안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를 잠깐.

그동안 우리 사회는
1) 1955년. 70여 명의 여성을 혼인빙자 간음한 것으로 고소된 사람. 박인수 사건.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혼 약속한 적 없어요. 다 자기가 대줬죠. 그리고 한 명만 처녀였습니다. 자기가 무슨 처녀 감별사라고... 1심에선 법원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무죄. 2심에서는 징역 1년.
2) 1988년. 성추행 피해 순간에 가해자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사람. 과잉방어로 고소됨. 1심에서 유죄, 2, 3심에서 결국 무죄 받음. 여성단체 공동대응. 그런데 심문 중 검사는 피해자가 진술하는데 가해 이야기 순서가 왜 틀리냐고 호통을 치고. 가해자 변호인은 피해자가 부도덕하다고 몰아세우고. 언론의 매도. 피해자 말하길,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이 수모는 안 당했을 텐데, 라고. 당시 형법 제32장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이 내용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짐.
3) 1991년.  자기를 21년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사건. 그땐 성폭행이 친고죄라서 자기가 6개월 이내에 고소해야 했음. 피해자 말하길,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당시에도 지역 여성단체가 모여 공동대응. 살인이었는데 집행유예 받았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의 직접적 계기.
4) 1992년. 자기를 13년간 성폭력한 의붓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사건. 당시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은 고소하지 못했다. 이때도 여성단체 공동대응했는데 더 잘 대처했다. 전국 대학생 대책위도 구성. 22명 무료 변호인단. 그럼에도 무죄는 못 받음. 남학생은 징역 5년 여학생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역시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의 직접적인 계기.
5) 2003년. 생존자 말하기 대회.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들에게 입다물라고, 네가 피해를 말하면 그 자체가 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야, 라고 말하는 것에. "세상에 들어라 나는 말한다"고 성폭력 말하기 대회 시작. 참여자들이 대중 앞에서 자기 경험을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매우 조심해서 진행했었음. 정말 많은 분이 자기 피해를 이야기하고 계셨다.
6) 2004년. 유영철. 21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해서 암매장했던. 왜 죽였습니까 물으니 "여자들이 몸을 함부로 굴려서"라고 답변. 유영철이 이런 말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사회가 유영철이라는 사람을 빌어서 "밤길 조심해, 우리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자만 보호할 거야" 이런 메세지를 보낸 게 더 큰 문제다. 그래서 밤길 걷기 운동 시작. 내가 달빛을 받으며 걸을 수 있도록 국가는 나의 안전을 보장하라 하는 시위. 2010년까지 매년 여름 6년 간 했다.
7) 2006년 용산초등생 성폭력사. 2008년 조두순 사건. 2010년 김길태 사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 정부가 나서서 엄벌주의를 가속화. 신상공개 강화.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19대 국회에서는 물리적 거세 법안도 나왔음.
여성단체에서는 엄벌주의에 대한 굉장한 우려.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사회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가해자를 괴물로 만들어서 사회에서 격리하면 그걸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냐. 처벌을 강화하기보다는 처벌의 확실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담당자들의 감수성도 높이고 전문성도 높여라. 이런 문제제기.
8) 2011년 - 현재. 27세 나이차 나는 여중생을 연예기획사 대표가 성폭행해서 임신 출산 시킴. 1심 12년형, 2심 9년형 등. 그런데 대법원은 이게 사랑이라고 판단해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심리 중에 여중생에게 매일 면회오라고 하고 매일 편지 쓰게 시킴. 얘도 시키는 대로 편지에 하트 붙이고 하나뿐인 내사랑 등의 문구 넣음.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하고 고등법원은 무죄 선고. 다시 대법원으로 재상고. 현재 340개 여성/사회단체가 공동대책위 결성해서 서명운동, 의견서 전달, 모의법정 등 진행 중.

두 사건으로 보는 변화
1) 1997년. 성폭력 피해 입은 여대생이 자살했다. 뉴스는 "수치스러운 삶 대신 죽음을 택한 이 양의 선택은 정조관념이 희박해진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라고 보도. 장난하냐.
- 피씨통신에서 400여명이 집단 반발. 여기서 특이했던 말. "지금은 언론이 30~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나 노년층에게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지 몰라도 10-20대 젊은 층에게는 제2의 언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통신이죠."
여성단체 항의 공문. 수치심을 느껴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다. 대학 학생회 성명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정조관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살을 해야 한다? 등등.
- 방송사 측 사과방송 나옴. "피해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죽음의 의미를 절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였는데...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됐습니다."

2) 2016년 5월 현재.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살해 사건'.
- 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근처 한 건물 화장실에서 여성을 노려 살해.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 한 시민의 제안으로 추모가 연이음. 강남역 10번출구 페이스북 페이지 개설. 피해자 추모 운동 시작. 수백 명의 자발적인 참여로 헌화, 추모의 글. 강남역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 등장.
- 경찰은 여성혐오범죄 아니라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발표. 경찰청장 기자간담회에서는 정신질환자 체크리스트, 행정입원, 취약지역 순찰 강화 등을 발표. 그러나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는 '살인원인을 조현병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반박성명. 국회에서는 공중화장실 법 개선하겠다며 새누리당에서 개정안 발의 예정. 공중화장실 남녀 의무 분리하겠다고.
- 뉴스는 범행 당시 장면을 반복 보도해서 국민의 공포와 분노 조장. 여성차별 강화하는 보도. 사건의 본질 흐림. 조현병 환자와 강력범죄의 문제라고 하면서 편견 심화. 대안은 부재. 근본적인 진단 및 비판과 대안 보도 부재.
- 온라인. 추모 참여자의 신상 노출해서 협박. 정신적 물리적 위협.
- 여성단체 공동대응 기자회견. 긴급집담회 "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 강력 대응하겠다.

3) 차이점
- 과거에는 여성단체 중심으로 움직였음. 이번엔 개인들이 바로 반응. 자발적으로 실천, 참여.
- 여성살인이 여성폭력 문제로 확대되면서 공감대가 확산되고 본인의 경험 말하기. 일상에서도, 거리에서도 말할 수 있는 문제로 변했다. 그만큼 여성들이 용기를 내고 힘을 낼 수 있게 됐다고.
- 반작용으로 엄청난 여성혐오 표출. 추모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

함께 논의하고 싶은 것
1) 공중화장실법 개정이 대안입니까?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 차별과 혐오를 규제하는 대응을 해야.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인간 이하 취급하는 문화를 그만둬야.
2) 정신질환자의 문제입니까? 오히려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3) 여성 대 남성의 구도로 가져가는 게 옳은가? 이보다는 실천적 대안으로.
4) 여성은 연약한 피해자인가? 오빠들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같이 탄 택시 안에서 문제 발생했던 사건. 혼자 가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일동 웃음). 연대하면서 힘을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5. 송란희: 여성운동 현장에서 본 여성폭력 살해 실태와 운동.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저희는 작년부터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라는 캠페인을. 카피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듣는 사람마다 쓰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양한데 오늘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폭력이 중심 활동인 단체에서 일하다보니. 여성폭력 매우 뻔하고 다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를 하게 돼요. 그런데 그 사이에 무수한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 여성에 대한 비난이 있다는 것. 그걸 뼈아프게 반성하게 됐다.
오늘은 여성폭력이 무엇인가부터 이야기.

여성폭력을 정의하는 문제
- 여성폭력 철폐선언(1993)에서 정의하는 여성폭력. "공사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게 신체적, 성적 또는 심리적 손상이나 괴로움을 주거나 줄 수 있는, 성별에 기반한 폭력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협박, 강제, 임의적인 자유박탈". 가족 내 폭력, 일반사회에서의 폭력,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구분.
- 한국에서는 여성폭력이 뭐라고 공식적으로 정의한 적이 한번도 없고요.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폭력 등으로 분절하면서 흩어짐. 그렇다고 그 각각이 뚜렷하게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여성폭력은 누구나 알지만 우리 사회는 이걸 한번도 공적으로 합의한 적이 없습니다.

여성폭력 실태
- 2012년. 성폭력피해생존자 말하기. "우리는 생존 외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 폭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서 기인하는 게 너무 명확하다. 한국은 성평등 지수 154개국 중 115위.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
- 국가가 이걸 제대로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아무도 추측할 수 없다. 실태조사 없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등 유형에 따라 3년에 한번 조사가 있음. 여성폭력을 아우르는 실태조사는 없다. 제가 국가 통계에 왜 집착하냐면, 실태를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잖아요? 근데 그게 없고요.
- 범죄 통계는 범주에 성별적 특성이 없음. 어떤 성별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를 얘기하면 (여성의 피해가 얼마나 뚜렷한지 나오지 않으므로) '남성 피해자자도 있잖아' 하는 반박을 받고. 그래서 성별 문제가 많이 희석된다. 저는 국가가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이걸 의도해왔다고 생각하고요.
있는 통계는 단순히 피해자가 여성 몇 명이다 남성 몇 명이다 뿐.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자의 특성, 범죄 발생 상황, 처리 결과 등 어떤 관계에서 어떤 특징으로 입는 피해인지는 알 수 없다. 최근 통계가 없어서 그냥 예전 통계를 쓰는데, 2004년 청주여자교도소 수감자 조사가 있다. 전체 수형자 531명 중 133명(30.5%)이자 살인죄 절반이 남편 살해로 수감. 이들 중 82.9%가 남편에게 굉장히 심각한 폭력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그러나 남편 살해 사건에서 아내의 피해 얘기가 아무리 나와도 법원에서는 한번도 정당방위가 인정된 적은 없다.
- 여성 살해에 대한 공식 통계가 없다. 국가에 문의했더니 없다는 답만 돌아옴. 그래서 한국여성의전화는 신문에 나온 사건 수를 세기 시작했다. 7년간 세봤더니 상당히 쌓였다. 2015년까지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657명, 미수 포함 1051명. 2.4일에 한 명이 살해되거나 살인미수를 겪는다. 신문에 보도된 것들만이니까 당연히 최소치인데.
진짜 같잖은 이유들로 수많은 여성들이 살해되고 있다. 헤어지자고 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의심해서,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생활고 때문에, 식사 차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술 취한 모습에 화가 나서, 강낭콩 껍질을 벗겨서, 양말과 운동화를 세탁하지 않아서, 전화 받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홧김에, 술에 취해 등등. 이 여자들이 그동안 왜 죽었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 그런 점에서는 정말 묻지마 살해였구나.
- 지금도 이렇다. 너무 많고 자연스러워서 이야기조차 못했던 것 아닐까? 너무 공기처럼 당연하고 만연해서? 이번 강남역 사건은 그렇게 쌓여온 게 표출된 거라고 생각.
- 강남역 추모자 인권침해 상황. 지금 하루만에 30명 정도 접수됐다. 자기 사진에 천개 정도 댓글 받아본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었더라.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하면, "이게 무슨 뜻이니. 그럼 죽고 싶다는 거냐. 죽여줄까 ㅇㅇ년아?"
피해자 분, 너무 괴롭고 힘들지만 끝까지 참여하겠다고.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여성폭력과 성적 불평등의 악순환
-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성적인 불평등에 기인하지만, 다시 성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묻지마 범죄, 화장실 범죄, 정신질환자 문제, 이성혐오, 이렇게 규정하고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더러 왜곡하고 축소한다. 가해자 처벌/격리 조치는 일차원적이고 단기간일 뿐.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와 차별을 해결해야지.
-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적 불평등의 악순환은 강력한 사회적 개입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제도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음. 둘이 합쳐져야 강력한 개입이 될 거라고 본다.
강남역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 중에서 무서우니까 씨씨티비 늘려달라는 글은 하나도 본 적 없어요. 화장실이 나쁘다는 글도 못 봤고요. 그런데 경찰과 정부에서는 하드웨어적인 측면만 발표를 해요. 정작 사람들이 느끼는 건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인데. 이건 어떻게 해도 할 수가 없다는 무력감의 표현이고, 결국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
- 대책. 다 아는 얘기라도 다시금 얘기하고자 한다.
1) 여성폭력을 포괄하는 법으로. 성폭력 가정폭력 등등 따로따로 다루는 특별법 말고. 여성비하, 여성혐오 등은 지금까지 제재가 없다. 여성에 대한 광의의 차별을 다루는 규제. 국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신을 밝히고 의무를 다하는 기본법이 필요한 거 아닌가. 심각한 상태이고 더 묵인하지 않겠다고.
2) 성폭력을 총괄하는 기구가 여성가족부에 있었는데 없어짐. 그리고 여성가족부는 성평등을 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지 오래다. 그럼 모든 부처가 협력해야 하는데 지금 그걸 누가 조율하냐. 그죠. 
3) 여성안심귀가, 씨씨티비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확산되길. 명명하고 가시화.

6. 정미례: 착취와 폭력의 현장에서 '살고 싶다'는 여성들의 소박함에 대하여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공동대표

주최측의 농간으로 갑자기 이 자리에 왔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근데 10분 안에 끝내라는데. 제가 5분 안에 끝내보이겠습니다.

착취와 폭력의 배경
- 착취와 폭력의 현장에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내용.
- 역사성을 따지고 보니까 실제로 혐오범죄 타겟은 이미 정해져 있었더라고요. 권력관계, 불평등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예전부터 성매매 여성은 이미 타겟이었음. 이들을 단죄하는 의미로. 이들이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측면도. 그래서 성매매 여성 살해가 오래 지속되어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고 찾으러 나서지도 않고. 그래서 범행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지는 형태가 많았다. 역사적으로도 많이 밝혀져 있다.
- 왜 여성인가에 주목. 우리가 많이 분노했던 이유. 실제 여성 대상 범죄가 있을 땐 혐오가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득권에 대해 말할 땐 혐오라는 말을 안 써요. 백인혐오 이런 말 안 쓰잖아요. 명명의 정치. 그리고 이걸 놀이처럼 만드는 현실. 여기에 문제제기해야 한다. 묻지마 범죄라고 하는데 그 말도 참. 실제 묻지마 범죄도 아니고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데. 피해자는 사라지고 가해자만 남고, 그래서 가해자의 말만 유통되고 있다. 가해자는 형량을 줄이기 위해 심신미약 등을 주장하고 모든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저는 가해자의 말은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해자의 말보다는 사회의 젠더폭력을 다시 봐야 한다.
- (개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건) 결국 우리를 침묵시킨다. 우리 여성은 침묵하지 않고 말하고 나서는데, 그 여성을 다시 타겟으로 삼는다. 정상/비정상, 보호대상/보호대상 밖, 정숙함/정숙하지 못함을 나누고. 후자를 타겟으로 삼고. 그리고 이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 이는 사회 구조적인 것이고 시스템 안에 정착되어 있고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 신자유주의. 소비대상이 되는 것.
성매매와 연결해본다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취약한 위치의 사람이 젠더권력의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마치 (포주와 성매매 여성이) 공평하고 평등한 것처럼 가정한다. 비대칭적 구조를 무시하고 그게 없는 것처럼 말하는 데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살고 싶다는 소박함
- "살고 싶다"는 말은 자살한 성매매 여성의 유서에서 발췌. 그러나 살고 싶다는 건 그저 개인의 소망일 뿐. 실제로는 살 수 없다. 생존해도 사회적 살인을 겪는다. 살 수가 없는 거죠.
- 여성에게 행해지는 폭력에 주목했으면.

최근 사례 소개
- 언론에 보도되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지금도 여성들 초상을 치르고 있다. 보도된 일부 외의 나머지는 대부분 자살의 형태로 다뤄진다. 최근에는 해외에서 살해당하는 일들도. 우리는 그저 보도되는 일부만 안다. 거의 보도되지 않음. 그래서 잘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여기 소개한 건 아주 극악한 형태로 선정적으로 보도된 것들임.

1) 여수유흥업소 여성사망사건. 20대 여성이 업주로부터 상습적인 폭력 폭행 성매매 강요 등을 받아오다 결국 사망한 사건.
- 언론의 보도 태도. 불쌍하다, 안 됐다 말고는 전부 가해자의 입을 빌려 나오고 있다. 가해자의 말은 당연히 낙인과 편견과 혐오에 잠겨 있음. 그래서 피해자에게 '너는 (동등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야지 살 수 있다'는 메세지. 
- 여성들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느낀다. 다른 죽은 여성들 보면서 나도 업주의 폭행 협박 당하고 그랬지만 우연히 살았다고 느낀다. 강남에 달리던 메세지와 똑같다. 당사자들 이 사건 보면서 많이 우셨고요.

2) 만 13세 청소녀 성착취피해자. 성인 남성 6명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 성착취 피해를 입었음에도.
- 미성년 여성이고, 대부분 성인 남성이 구매. 상대 여성이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면서도 마치 자기가 사회사업가인 것처럼 내가 잠자리를 제공해줄게 하고. 주변 사람들조차도 거기에 동조하고 함께 범죄 저지름. 이런 거 보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모두가 공범입니다. 단지 기회가 안 주어졌을 뿐이에요. 눈치를 보고 있다가 기회가 생기면 가는 거죠.

- 피해 여성이 안전할 수 있는. 그리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당사자들이 이걸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들어야 합니다. 국회 토론 보면서 반성했다. 아 더 늦게 가더라도 천천히 진행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이걸 듣도록 해야겠다고 생각, 반성.
- 내일 달릴 댓글 걱정하며 이런 얘기를. 제가 처음 여성운동하면서 받았던 혐오는, 여성운동하는 애들은 못생기고 키작고 뚱뚱하다는 소리였다. 근데 제가 다 해당되더라고요. 내가 이런 소릴 들으면서 계속 해야 하나. (그렇게 나는 극복했는데) 그러나 이게 개인적인 각성을 떠나서 사회 전체의.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대했으면 좋겠습니다.

7. 최지은: ㅇㅇ녀는 어떻게 탄생하고 죽어가는가 - 한국 언론의 젠더의식 부재
웹진 <아이즈> 선임기자

저는 앞에 말씀하신 분들처럼 학술적인 연구를 하거나 현장에서 활동한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여기 앉아계신 다른 분들과 비슷한 사람이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러 나왔다고 생각. 제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한국의 젠더의식에 대해 많은 여성들이 비판과 항의를 해왔는데, 그게 계속 축소되거나 묵살되는 걸 보면서. 혹시 언론계 내부에서는 정말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했고.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언론이 만드는 ㅇㅇ녀
- 지난 주 토요일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추모 집회. 그 현장에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성평등기준 시정권고 심의기준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있었다. 왜 그 자리에서 그 서명을 해야 했는가. 최근 언론에서 이런 단어 많이 보셨을 거예요. 대장내시경녀, 트럼프녀, 나영이 사건. 이건 전부 남성 가해자가 여성 피해자를 낳은 사건. 그런데 언론에서는 여성 피해자를 부각시키며 자극적으로 다뤘다. 그러면서 ㅇㅇ녀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점점 임계점에 달한 게 아닌가. 서명에는 온/오프라인에서 현재 천이백명 참여했다.
- 여성이 가해자일 때도 ㅇㅇ녀 하는데, 피해자일 때도 당연하게 ㅇㅇ녀. 된장녀. 김치녀. 성폭행피해녀. 이제 법적 대응을 하면 신고녀, 고소녀. 그러나 남성의 성별은 헤드라인에서도 본문에서도 표기가 안 된다. 글자 수 문제로 줄인다고 하는데, 몇 글자 차이 안 나는 피해자도, 피해여성도 아니고, 그냥 ㅇㅇ녀. 남성은 가해남이라고 하지 않는데. 어떤 분들은 가해자 성별표기 운동 이야기하기도 했다.
- 그런데 이건 기사에서 남성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두고 여성만 성별 표시를 하는 것. 차별적이기도 하지만. 그에 더해 자극적인 헤드라인마다 가해자 성별 지우고 여성만을 보도하며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생각. 강력사건 같은 경우엔 범죄, 사치, 치정, 이런 데 여성이 부각되니까 여성이 꼭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저질러서 누가 상처를 입었는지가 아니라 여성이 마치 갈등의 필수요소처럼 다뤄진다. 여자가 끼면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여요. 
- 그런데 반면 가해자의 변명은 헤드라인으로. 그리고 가해자에게 동정적으로, 감정이입. 성폭력 관련해서도 매우 충격적인 헤드라인들 많았다. 가해자가 한 말을 헤드라인에 그대로 쓰고. 안타까워하고.
- 범행 당시의 상황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전면에 보여주면서 관음증적인 소비를 하도록. 자극적인 제목. 이렇게 여성이 저항하지 못하거나 수동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자극적인 요소로 쓴다. 결국 기사를 보는 사람들이 이걸 포르노로 소비하게 한다. 댓글에서는 감정이입을 가해자에게 하거나, 나도 확 해버리고 싶다, 피해자 품평 등 2차가해 댓글이 많이 달린다. 
- 언론사 SNS나, 온라인 뉴스팀이란 식으로 기자 실명 안 걸고 내는 기사들 늘었다. 어떻게 이런 걸로 농담하나 싶은 상황에 나름 "재치"를 발휘하려 하는 제목들. 몰카에 "은밀하게 위대하게". 뒤에서 성추행한 남성 "섹시백에 반한 성추행남, 에잇 못참겠다".

언론의 2차가해
- 여성은 그냥 이 사회의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기사 안에서 끝없이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 풍조. 여성혐오를 확대재생산하고 남성을 자극한다. "말조심해야지, 강남 묻지마 살인에 위축된 남성들".
- 어떻게, 언론사들이 정말 원칙이 없는 걸까. 그런데 한국기자협회 정관에는 인권보도준칙이 있고,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권고 기준, 성폭력 사건보도 가이드라인 등 원칙이나 지침은 이미 있다. "언론은 가해자의 사이코패스 성향, 비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부각하여 공포심을 조장하고 혐오감을 주는 내용의 보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 "가해자의 변명을 그대로 전달하여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 "언론은 성범죄의 원인으로 개인의 정신질환이나 억제할 수 없는 성욕 등의 문제만 부각하지 말고 그 근본 원인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에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언론은 가해자 중심적 성 관념에 입각한 용어 사용이나 피해자와 시민에게 공포감과 불쾌감을 주고 불필요한 성적인 상상을 유발하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등. 우리가 상식적,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원칙은 다 들어가 있다. 아무도 지키지 않을 뿐이다.
- 언론이 지금 하고 있는 보도 행태는 2차가해라고 볼 수 있다. 개인들이 꾸준히 비판하고 있고, 하지만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오프라인에서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경우. 시민들이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 지난 4월 연합뉴스에서 소라넷 운영자에 빙의한 가상 기사 냈을 때. "어쨌건 지금은 떠나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등. 가해자에, 범죄자에 왜 그렇게까지 빙의하는지 알 수 없는 기사들. 왜 그토록 많은 피해자들을 낳은 범죄에 이입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몇몇 분이 연합뉴스 본사를 방문했고, 그 뒤 연합뉴스 내부에서는 기사 제목에 여성이나 소수자 비하를 피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 그러나 헤드라인에 안 쓴다고 바로잡히냐 하면 그건 아님. 너무나 새롭게 다채롭게 2차가해 하는 기사들. 연합뉴스에서 바로 다음에 낸 "비혼이 대세? 외국 처녀라야 딱지 떼는 총각에겐 상처"라는 기사. 자세히는 생략하겠다.

'일부 언론'이 아니라

- 정말 놀라운 건. 페이지뷰가 존폐와 직결되는 군소언론만 하는 게 아니라.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3사가 모두 이러고 있다는 점. 한국 언론이 정말 젠더의식이 없고 왜곡된 모습을 퍼뜨리고 있구나. 그러면서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내부에서는 과연 성찰과 반성의 의지가 있는 것인지.
- 어제. 부산에서 지나가던 여성을 가로수 지지대로 폭행한 사건. 이거 보도를 "또 여성을 상대로 묻지마 폭행"이라고 했다. 아니 근데 "또"라는 말에서 이미 분명히 여성을 상대로 한 선별적 폭행이라는 게 드러나는데, 그 뒤에 굳이 "묻지마" 폭행이라고 쓰는 게. 대체 묻지마 폭행을 무슨 뜻으로 쓰는 것인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구나. 반성이 없구나.
- 언론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그리고 이런 언론이 과연 사회의 다른 부조리와 병폐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지금 언론과 포털이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가. 저는 한 여성이자 시민으로서 묻고 싶습니다.


8. 마무리
김금옥
-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안한 사회인가. 국가의 책임. 여성들의 반응. 쭉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생략)

질문 및 코멘트
- 여성혐오 아니다, 성대결하지 말라, 그런 반응들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이런 짓을 계속 해야 하는지.
- 저는 청주 장애인 연합(*부정확) 일원인데, 범죄 원인을 정신질환으로 몰아가는 게 장애인으로써 매우 기분이 나빠요. 지금도 정신장애인은 사회와 격리되고 차별을 겪고 있다. 경찰과 검찰은 지금도 여성의 분노를 장애인에게 향하도록 몰아간다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다. 의식 있는 분들은 여기에 절대로 속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청주에서 정신장애 겪는 여성이 다른 여성 뺨을 때리는 사건이 있었는데, 매우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음에도 참작 없이 실형이 선고됐다. 장애인을 필요에 따라서 갖다 쓴다. 편견 말고 지지 부탁드립니다.
- 저는 흔한 한국남자인데요. 며칠 동안 페이스북으로 키보드 배틀을 많이 하면서 깨달은 건데, 저는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틀리지 않다고 믿지만 페미니즘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이게 여성혐오냐고. 난 여자 안 싫어하는데. 어떻게 쉽게 많은 분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가 없을지.
- 저는 강남역 10번출구 페이스북 관리자입니다. 처음에 그 자리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그 수많은 포스트잇을 보고. 평화적으로, 이야기하자, 공유하자, 였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맞을까봐 사진 찍힐까봐 걱정해야 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오늘 나온 표어대로 살아남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것. 우리에 관해 계속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증명하자. 다음주 수요일 7시쯤 집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여보려고 한다. 아직 제대로 된 기획이 나온 건 아니지만. 강남역 10번출구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보시고 많이 참여해주시고 이야기 나누었으면.
- 저는 가락동 살인사건에서 딸을 잃은 엄마입니다. 여기 나온 이유는. 제가 딸에게 너무 해줄 게 없다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그 인간은 우발적이라고 하지만, 준비를 너무 철저하게 해왔어요. 등산복에 나이프에 로프에 염산까지. 우발적이라 하면 한번이나 찌르고 도망을 가야지 우발적인 거지. 그 가냘픈 몸에 여기저기 난도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경찰서에서까지 칼이 나오고. 이런 것들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탄원서밖에 없어서. 탄원서에 서명을 받으려고 나왔습니다. 저도 여자이기 이전에 엄마이니까. 아파서 누워있을 시간도 없고. 제가 딸을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아는 것도 없고. 여기 동참하다 보면 딸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나왔습니다.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 숙명여대 법과대학 재학생입니다. (못 들음;)
- (수없이 죽은 여성들에게 관심을 환기시키는) 운동의 한 방법으로, '여성장'을 치르는 건 어떨까 하는 지인의 제안이 있었어요. 어떤 언어로도 담아낼 수 없는. 기존의 장례 절차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성장'을 만드는 건 어떨지. / 언어의 문제. 몰카, 슴만튀, 엉만튀. 이런 말들이 불편하다. 제가 오래 전에 당했을 때. 이런 말을 알고 나서 너무 허무했다. 이거 그냥 오락거리, 유희구나. 몰카도 마찬가지로, 무단촬영이나 강제촬영이라고 해야 걸맞지 않나. 예능에 쓰이던 말을 그대로 쓰고, 가해자가 쓰는 말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적고. 그러니 몰카 같은 말을 쓸 때는 반드시 '소위 이렇게 칭해지는'이라고 부연하거나 "따옴표"를 치는 등 그대로 쓰길 거부하면서 말을 만들어가면 어떨까.

패널 답변
김수아
- 온라인에서 싸우는 분들 많죠. 예전 피씨통신이 지금 그렇게 됐습니다. 네이버 댓글이 지금 남자가 많잖아요. 힘들어서 안 싸우기 시작했더니 그런 댓글만 남아서 그런 댓글이 뉴스에 나오더라고요. 힘든 거 알아요. 반 농담 식으로 말하는데, 싸우다 보면 알게 되거든요, 저 사람들이 논리로 대응하는 게 아니에요. 무논리에는 무논리로 대응하는 게 방법일지도 몰라요. 그 사람들은 토론이 목표가 아니거든요. 목표는 네 입을 막겠다 입니다. 왜 온라인에서는 마지막에 댓글 다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하잖아요. 무슨 말을 해서라도 말이 막히지 말아야 합니다. (박수) 이게 정말이에요. 저는 피씨통신 때부터 느꼈습니다. 제가 언론을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언론이 당황하고 사람들이 당황하는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피해자는 말을 못했잖아요. 죽었거나 힘들어서. 그래서 편하게 가해자 말만 담으면 됐잖아요. 근데 이제 말하기 시작했으니까. 가해자 말만 담다가 피해자 말도 담아야 하게 된 거죠. 언론이 왔다갔다 하는 걸 보면 그게 보여요. 가이드라인 생기기 이전 이후를 비교해 보면 성폭력에 대한 보도가 줄었어요. 성폭력이 줄었느냐, 아뇨 성폭력 사건은 늘었어요.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지침을 지키느니 그냥 보도를 안 하겠다? 언론의 관행이 너무 공고하고. 그래요. 우리가 침묵하는 게 자꾸 그걸 도와주는 식으로 작용해요. 힘들어서 그러시는 거 아는데 정말 도와주는 게 되더라고요.
- (여성혐오 말고 다른 말 없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여성혐오라는 말도 그냥 쓰면 돼요.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이해를 다 해서 동의해서 쓰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그렇게 쓰면 그렇게 배우잖아요. 그냥 그대로 쓰는 건데. 언어를 고민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어려운) 문제일지. 오히려 우리 사회의 미소지니가 정말 심했구나, 지금 이걸 언어로 잡아낼 수 없을 만큼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증거. 그리고 왜 여성혐오냐고 하는 분들 중에는 그냥 자기 말을 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이 여성혐오라는 말을 그대로 가져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나영
- 여성혐오라는 말로 공격당하는 분들 많잖아요. 20년간 공격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았어요. (일동 박수)
- 남자 기자가 자꾸 강남역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라고 묻더라고요. 니 눈엔 그게 갈등으로 보이니. 그냥 자기 경험을 평화롭게 이야기하겠다는데, 근데 목숨을 걸고. 여기(추모)에 대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협박하는 걔네가 문제인데 왜 이걸 "갈등"으로 보느냐. 폭력의 현장이 그 사람들한테는 갈등으로 보이는 거예요. 아니 그리고 피해자가 왜 설득을 해야 하냐. 피해자가 자기가 왜 피해 당했는지 설득해야 하냐. 제가요 이러이러해서요 그래서 오빠가 때렸고요. 왜 우리한테 설득을 요구하세요. 그건 가해자의 역할이고 특권층의 역할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기를 들여다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 오늘 다른 기자가 전화해서. 여성혐오가 두드러지는 현장에 가려면 어디 가야 하나요, 라고. 네가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해하는지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그게 다 여성혐오다. 제가 홍성수 교수님 정말 좋아하는데 죄송하지만, 여성혐오가 이렇게 드러날 줄 몰랐다고 하셨는데, 본인도 정말 몰랐던 겁니다.
-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볼 때) 저는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합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기사가 있으면 계속 메일을 보내서, 스팸메일처럼 계속 보내서 사과를 받아내라고 해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끈질기게.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싸울수록 강해집니다. 전투를 할수록 맷집이 생기고 계속 강하게 돼요. 그러다 동지를 만나고. 같이 싸우면서 점점 더 강해집니다.
- 남자들 일반화시키지 마라, 내가 왜 가해자냐, 하는데. 제가 그랬잖아요. 정신분열증이라고. 맨날 보는 그 음란물, 만화, 그게 다 여성혐오인데 자기가 자기를 몰라요. 자기가 매일같이 의식없이 행하는 그 온갖 조롱과 시선과 말들. 그게 다 여성혐오입니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실제 가해자. 그걸 왜 모르냐.

홍성수
- 용어에 대해. 저는 법학이 아니라 법사회학 전공이라 법적 담론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 언어가 법적 담론에 있지만, 보통 기존 남성의 담론이고 남성으로 구성되는 담론이 대부분이에요. 법의 언어가 사회의 언어로 넘어가면 원래 말하려던 것보다 희석되고 왜곡되는 게 대부분이긴 합니다. 그런데 그거 자체가 나쁜 게 아니에요. 사회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도 의미가 있고요.
그런데 법 언어가 우위를 갖고 사회의 언어를 제압하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폭력". 법에서 "폭력"은 굉장히 협소한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폭력이라고 하는 건 (법적 "폭력"이 아니라도) 그럴 만한 의미가 있죠. 여기에 대해 법적으로 폭력이 아니라고, 폭력이라고 하는 건 멍청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하고... 법적 담론은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성혐오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여성혐오"에는) 좁은 의미로만 단정할 수 없는 광범위한 맥락이 있습니다.
- 용어가 사회적으로 정당하다면 어떻게 법과 병치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지. 너네가 틀렸다고 한다든가, 법적 언어에 밀린다든가 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 "혐오"는 사실 일상용어로는 안 맞는 면이 있어요. 근데 안 맞는다고 해서 이 말을 양보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마땅한 대체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떻게 말의 권력을 얻어나가냐는 하나의 싸움인 것이지, 논리적으로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이미경
- 우선 용어에 대해서. 몰카라는 말은 범죄성을 축소하고 희화화하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에 무단촬영, 강제촬영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주셨는데요. 적절한 용어를 만들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성폭력 피해자'라는 말의 이미지가 나약하고 가치 없다는 이미지라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생존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경험자'는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논의 중에 있습니다.
- 말하기의 힘. 피해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는 것, 그게 '객관적'이라고들 하는 잘못된 가치나 개념에 얼마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봐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많이 말해야 하고요. 침묵하는 것은 곧 동조이기 때문에. 이 침묵을 깨고 만들어나가는 사람이어야.
- 역사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하죠. 운동하면서 많이 변했습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도 우리가 바꿔나갑시다.

송란희
- 팁을 하나 공유하겠습니다. 너는 남혐하잖아, 라는 사람들에게, 니혐이라는 말을 주고 싶습니다. 이건 남혐이 아니라 니혐이거든. (박수) 제가 아껴놨던 건데 여기서 공유하겠습니다.
- 기사 읽고 댓글 달고 토론회도 나가고. 무엇이든지 하자고. 예전에 쓰던 말이,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인데요. 우리가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침묵을 깼으니 끝까지, 함께합시다. 감사합니다.

최지은
- 온라인 싸움 노하우를 드리자면, 적성에 맞는 걸로 하세요. 나는 싸움이 적성에 맞는다, 싸울 때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그럼 글쓰기를 하시고. 아니다 나는 안 맞는다 싶으면 남이 쓴 글에 좋아요나 반대를 누르는 걸. 어쨌든 의사표현 하기를 멈추지 말아주셨으면.
- 그리고 단체에 계신 분들은 차마 이야기 못할 것 같아서, 제가 이런 자리에 나오면 하는 말인데요. 내가 후원하고 싶은 단체를 찾아서 정기후원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금옥
- 혐오세력에 맞먹는 큰 집단을, 우리가 함께,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손잡기 위해서.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 안전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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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명예 Honor Diaries>


감독파울라 퀘스킨
국가Canada, USA
제작년도2013 년
상영시간60'
장 르Documentary
영화정보HD | color | E



이 영화는 무슬림 사회에서 활동해 온 9명의 용감한 여성인권 운동가들의 대화로 채워져 있다.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직접 목격해 온 이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 그 이상에까지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 인권의 참상에 대한 몰이해 그 자체인 '정의'의 무력함을 폭로한다. 이동권, 교육권의 박탈은 물론 강제 결혼과 여성 할례는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문제이다. 

아랍의 봄 이후, 그동안 침묵해야 했던 여성들은 기나긴 성차별과 억압의 역사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화 <그들의 명예>는 무슬림 사회의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알리고, 나아가 행동하도록 하는 운동이다.

“당신에게 명예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명예'를 위해, 종교와 사회적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행되는 명예살인과 폭력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영화는 무슬림 사회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의 필요성, 연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저마다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여성 인권 운동가들을 보며 우리는 희망을 본다.

파울라 퀘스킨 Paula Kweskin

<그들의 명예>의 감독 파울라 퀘스킨은 영화감독과 인권변호사를 겸직하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채플힐 대학에서 학사와 법학박사 학위를 수료했으며 현재 뉴욕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아르헨티나의 마이크로 크레딧 주민 법안 발의, 범죄자특별송환판결 피해자 변론, 가정폭력 피해자 구제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인권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있다.


메모를 하지 못해 기억에 의지해 정리함. 구체적인 대사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1. 성차별 gender apartheid

- 이란에서 여자는 '법적으로' 남성의 절반짜리 사람에 불과하다. 증언력이나 권리 등을 남성의 절반만 인정받기에 양육권이나 상속 등에서도 매우 불리하다고. "여성은 2등시민이에요. 몸도 자기 것이 아니죠."

- "여자는 정숙하게 행동해야 해요. 트위터, 페이스북도 금지죠."

- 여자는 마음대로 공공장소에 있을 수 없다. 보호자가 있는 경우는 예외다. 보호자는 첫번째로는 아버지고, 그 다음은 남편, 그 다음은 아들이다.

- "이동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마음대로 외출하지 못해요. 언제 나갈까? 누구와 나가지? 언제 돌아와야 할까? 그런 걸 끊임없이 확인해야 해요."

- 여성 운전이 금지된 사우디. "저는 교육받은 직업인이에요. 운전할 줄 알아야죠." (운전을 하려는 한 여성)

- "저희 어머니, 할머니 대는 히잡을 쓰지 않았어요. 옷도 마음대로 입었죠. 여자들이 교육도 받고, 의사나 판사도 됐어요." 이란은 1978년 혁명이 일어나고 1979년 새 정부가 들어선 후 현재의 여성차별 상태에 들어섰다. "여성의 지위는 100년에 걸쳐 발전해왔어요.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처음으로 돌아간 거죠."

- "남자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깟 천쪼가리 하나를 상징적인 의미로 머리에 두르는 게 뭐가 문제야. 민주주의와 자유가 중요하지! 저는 그때도 이렇게 말했죠. 장난해? 진짜로? 당연히 다르지. 머리에 천쪼가리를 둘러야 한다는 건 전혀 다른 세상이에요. 자기들이 하루종일 터번을 써보라지."

- 복장이 불량한 여성은 길에서 공개 채찍형을 받는다. 때리고, 도망가고, 휘두르고, 쓰러지는 장면들. 길 가던 여자가 복장 불량이라고 경찰들이 차에 강제로 태우는 장면.

- "'부도덕한 행위'가 법에 정해져 있어요. 아예 조문을 만들었죠. 거기에 '부도덕한 복장' 조항도 있어요. 그런데 어떤 게 부도덕한 복장인지 규정은 없어요. 아무 남자나 지나가는 여자를 세워서 복장 검사를 할 수 있어요. 아무 남자나요. 복장이 불량하면 법원에 가요. 저도 두 번이나 다녀왔는걸요. 누가 날 부르더니 복장이 안 좋다는 거예요. 치마 앞이 갈라져 있다고요. 어쩌라는 거야. 벗을까요?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안 돼! 결국 저를 감당 못한 남자가 경찰로 넘겼죠."


2. 여성할례
- 여성할례에 관한 규정은 코란에 없다.

- 포경수술과는 전혀 달라요. 오로지 억압할 목적으로 하는 거죠. 성기를 잘라낼 뿐 아니라 질을 꼬매기도 해요. 손상, 감염, 사망.

- "다리를 벌린 순간 '이건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마자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죠. 순식간에 50쌍의 손들이 달려들어 나를 누르고 내 입을, 내 코를 막았어요. 나는 계속 난동을 부리며 싸웠죠. 싸우고, 싸우고, 싸웠어요. 뭔가 잘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요."

- "5살 때였어요. 어머니가 절 할례하는 여자에게 데려갔죠. 저를 두고 둘이 가격 흥정을 했어요. 어머니가 돈을 더 주면서 부탁했어요. 새 면도칼을 써달라고요."

- "제 동생은 할례를 받다가 죽었어요." "정말요? 몇 살이었나요?" "생후 1주일이었어요." (미국 TV 인터뷰에 나온 익명의 남자애)

- 이민국에서 이런 시술은 불법이므로 아이들을 할례시키기 위해 고국으로 데려가기도 한다고. "이 아이들에게 이번 연휴는 자신의 성기 일부 또는 전부를 잘라내는 때가 될 것입니다."

- "제가 잘 알아요. 할례는 여자들에게 좋아요. 할례를 한 여자애들은 키도 크고 예쁘니까 청혼을 받아요. 안 한 애들은 작고 뚱뚱하죠." (할례를 옹호하는 한 할머니 대답)

- "이슬람 여자들이 정숙한 이유는 할례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데서나 성욕을 발산하는 서양 여자들과는 다르죠." (TV 토론 같은 데 나온 율법학자)

- "삼촌 집에 갔는데 그집은 딸들 할례를 한다고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어요. 저는 할례의 위험성을 정리한 작은 책자를 들고 조용히 삼촌 방에 들어가 책자를 전했죠. 이걸 막아달라고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할례를 할 때 삼촌이 울면서 나와 딸에게 몰랐다며 무릎 꿇고 속죄를 했어요. 둘째 딸은 다음 날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중지됐죠. 어머니는 그 일로 저를 불러 채찍을 때렸어요. 감히 남자에게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했다고요. 하지만 그 집은 달라졌어요. 두 사촌은 결혼을 했고, 두 집 다 할례 전통을 끊었어요."

- "남자들은 여자의 일이니까 모른다고 하죠. '누가 하랬나?' 하고요. 여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으니까요. 알아서 결정하라고요. 왜 아무도 가부장제에 의문을 품지 않죠?" / "딸 가진 엄마들은 아는 거죠. 순종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요. 할례를 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못하니까요." / "여성이 공범자가 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은 가부장제를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죠. 여자들이 알아서 지탱하니까요."



3. 조혼

- "14살 때 부모님이 저를 불러 사진을 보여줬어요. 8살에 약혼한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과 결혼하라고요. 거절하면 가문의 명예가 손상된다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몇 주 동안 절 감금했어요. 풀려나려고 결혼하겠다고 한 뒤 도망쳤어요." (맨 처음 시작하는 장면)

- "알린다(?)는 10살이지만 이미 결혼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녀가 성관계가 싫다고 하자 남편은 그녀를 강간했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폭행하고 강간하고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처벌은커녕 법에 따라서 보상을 받았습니다."

- "그가 저를 만졌어요. 제 안에 넣으려 해서 저는 싫다고 했어요. 그는 상관하지 않고 저를 이용utilize했어요." (8살 여자아이)

- 전문가들은 조혼이 부인과 아이 모두가 단명하는 원인이라고 한다.

- "저는 제 사촌과 결혼하라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요?' 하니까 집안 남자들이 모두 웃었어요. '사랑? 그런 게 어디 있어?' 라고요. 사촌은 3년 동안 매일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찾아왔어요. 마음이 바뀌었는지 확인하려고요. 마침내 고모가 말했죠. 네가 거절하면 우리가 가문에 영향력이 없어진다고요. 저 말고 다른 애들을 강제로 결혼시키지 못하게 된다고요. 아니 강제 결혼을 안 시키면 되잖아요?"

- "저는 좋은 남편을 만났고 행복한 결혼을 했어요. 저희 부모님은 그렇지(연애결혼) 않았죠. 집안 어른이 그랬대요. 경사가 너무 없으니 결혼식을 열자고.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했죠.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결혼이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어머니를 깊이 사랑했어요. 하지만 그건 중매결혼이지 강제결혼이 아니었어요."

- 가정폭력 상담을 받는 단체 카르마 니르바나. 하루에 600통의 전화가 온다.



4. 명예살인 honor killing

- "명예는 아주 중요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여자는 가문의 평판을 해칠 힘을 갖고 있다고 배워요. 가문의 명예가 제게 달려 있다고 말이죠."

- "같은 학교를 다니던 한 언니는 15살 때 결혼했어요. 갑자기 몇 달 사라졌다가 결혼한 몸으로 다시 나타났어요. 언니는 결혼한 후부터 불행하다고 했죠. 제가 집을 나오라고, 저희 집으로 오라고 말했어요. 언니는 그건 명예롭지 않다고 거절했죠. 출석일수가 한참 모자라서 한 학년 아래인 저와 같은 수업을 들었어요. 결혼반지를 끼고요. 언니는 여전히 영어로 말했지만 다시는 결코 서양식 옷을 입지 못했죠. 그리고 자살했어요. 온몸에 불을 질러서요. 그게 명예로운 방식이니까요, 이혼을 하는 것보다 말이에요. 그렇게 배운 거예요. 언니는 죽기 전에 저를 한번 바라봐줬어요. 그리고 불타 죽었죠. 그 경험으로 저는 활동가가 됐어요."

- 이라크인 기독교도를 돕는 활동가가 자기 공동체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종교의 문제일 거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슬람교 외에도 힌두교에서, 남아시아에서도 명예살인이 일어난다고 반박당했다. 명예살인은 (종교를 따라서가 아니라) 남아시아에서 전속된 풍습이다.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유럽과 미국에서도 수없이 일어나죠."

- "저희들은 명예는 날씨 같은 거라고 하죠."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조절할 수 없으니 그냥 당해야 한다는 뜻인 듯. "명예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에요. 하지만 이 질문이 희생자에게 돌아가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거죠."

- "룩사나라는 친구가 생각나요. (울먹임) 죄송합니다. (침묵) 룩사나는 15살 때 학교를 중퇴했어요. 결혼하려고요. 애가 사라졌는데 아무도 몰랐죠. (미국에) 돌아왔을 땐 임신 7개월이었어요. 고국으로 떠났다가, 배가 불러 돌아오는 거예요. 룩사나가 집에 돌아갔을 때 그 애 어머니가 오빠 둘과 막내 남동생을 같이 앉히고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네 애가) 그 남자의 아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선택지가 있어. 지우든가, 여기서 죽든가.' 룩사나가 불명예라는 거죠. 아들 둘을 시켜 뒤에서 다리를 누르고 목을 졸라 죽였어요. 막내는 그 옆에서 그 모습을 보게 했죠. 보고 배우라고요. 명예를 어떻게 지키는 건지. 그 어머니는 종신형을 받았어요. 제가 교도소로 강의를 나갈 때 그 교도소도 갔었어요. 강의를 한 13년 동안 한 번도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죠. 대신 교도관을 통해 제게 말을 전했어요. 자기는 명예와 알라의 이름으로 했다고요."



5. 명예폭력

- 딸에게 산을 부어 죽인 부모가 구속됐다. 딸이 남자애를 돌아봤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돌아보더라고요. 제가 때렸고 애 엄마가 산을 가져왔어요." (아버지) "그 애는 그렇게 갈 팔자였어요." (어머니)

- "(이란) 혁명 초기에는 화장을 하는 여자들에게 면도칼을 들이대기도 했어요. 립스틱은 금지였죠. 제가 립스틱을 발랐을 때 어떤 여자가 제게 다가와서 '그건 부도덕한 거야. 내가 지워줄게.' 하며 휴지를 꺼냈어요. 옆에 있던 여자가 '손수건이 더 나을 거야.' 이러면서 손수건을 내밀었어요. 제 립스틱을 지우는 척 하면서 입술을 찢어놨죠."

- "명예살인, 폭력이 용인되기 때문에 처벌은 매우 가벼워요. 가벼운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도 있죠. 명예를 지킨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 갖가지 방법으로 맞거나 죽은 여자들이 나온다. 15대를 맞아 얼굴이 조각조각 난 여자. 살아있는 채로 남편에게 코와 귀를 잘린 아내. 습격당해 산을 맞고 폭행당하고 강간당한 뒤 길에 버려진 대학생들. 남자친구가 생겼다, 말대답을 한다, 서구화됐다westernized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파키스탄, 인도, 수단 등 이슬람 국가만이 아니라 독일,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서구에서도 일어난다. 여자들은 해당 국가의 행동양식을 받아들이지만 공동체/남자 가족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때.

- "학교에서 멍투성이로 다녀도 보호받지 못해요. (백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담당 기관에 신고하고 아이를 보호하죠. 하지만 무슬림 아이들은 멍투성이 그대로 내내 학교를 다녀요. 담임도 이렇게 말해요. '걔넨 그래.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무더기로 자퇴하고.' 수많은 여자애들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요. 한 마을에서 무슬림 소녀 110명이 사라지기도 했는데 말이에요." / "보여주려 해도 보지 않아요. 여기 상처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하고 목을 보여주면 어서 히잡 도로 쓰라고 하죠." 

- "경찰에 신고해도 돌려보내져요. 그러고 사건이 일어나면 '정말 죽을 줄 몰랐다'고 하죠." 한 여성은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뻔한 후 경찰을 찾아갔으나 경찰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버지의 살인미수로 병원으로 실려간 그녀를 촬영했지만 그 영상은 결국 자료로 쓰이지 못했다. 경찰은 그녀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명예살인을 이해하지 못한 거죠. 구체적인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도요. 기록을 보니까 자길 죽일 책임이 있는 사람 목록을 전부 적어서 제출했더라고요."

- "샤피아 사건은 정말 충격이었죠. (캐나다에서 파키스탄인 아버지가 딸을 죽인 사건. 딸이 연애를 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에 구속된 그 아버지는 '그 일을 처리하고 저 자신한테 정말 잘했다고 속삭였어요. 100번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할 겁니다.' 등의 발언을 했다.) 사람들은 그걸 문화라고 말했죠. 일부 캐나다 사람들은 동정하기까지 했어요. '그런 문화에서 자랐는데 어쩌겠어. (으쓱)' 그걸 보고 캐나다에 있는 아프간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했는데요! '자기가 우리를 대표하나!' 하고요. 그건 문화를 존중하는 게 아니에요." / "(그런 사건을 보고도) 그걸 문화라고 여기는 건 인종차별 같아요." / "인권 문제라는데 받아들이질 못하죠. 여성 인권이 무너지고 있는데 문화상대주의가 왜 나오냐고요."

- "책임지기 싫으니까 외면하는 거예요. 문화로 차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거죠. 자칫하면 이슬람공포증이라고 욕을 먹으니까요." /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제가 무슬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면 이슬람공포증이라고 진작에 제지당했을지도 모르죠." / "이슬람공포증이라는 신조어가 이런 현상을 대변해요. 이슬람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건 별개의 문제죠. 이건 인권 문제입니다. 저는 강연을 나가면 이렇게 말해요. 받아들이지 말라고요. 욕 좀 먹으면 어때요? 욕은 아무리 먹어도 죽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걸 지적하지 않으면 누군가 죽어요.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요."



6. 마무리. 공포와 다짐.

- (한 활동가가 아들들에게) "어머니가 이런 사람이란다. 어떻게 생각하니?" "방범용 스프레이 갖고 다니세요. 어머니가 다니는 나라 때문에 드린 게 아니에요. 조심하세요. 위험한 사람이 다가오면 물리칠 수 있어야죠. 강력한 표현을 할 거면 강력한 무장을 하세요." "사실 네가 준 스프레이 버렸어. 여행 중이었거든. 하지만 다시 구입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 "저는 독실한 이슬람교도에요.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시선도 많지만, 제게는 종교가 힘의 근원이에요. 하지만 교리에 남자들이 우리를 갖고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고 써있다면, 그걸 어떻게 바꾸죠?" ... "이메일로 협박이 정말 많이 와요.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런 건 넘어갈 수 있죠. 살해나 폭행 위협도 엄청나게 와요. 특히 구체적인 성폭행 위협을 받으면 정말 무서워요."

- "강연하고 돌아가는데 누가 제 차에 폭탄을 실었다는 거예요. 목적지에 도착하니 경찰이 길다란 막대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죠. 그들이 제 차를 샅샅이 검사하는 동안 너무 무서웠어요. 결국 폭탄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들이 그러더군요. 당분간은 애들 학교 보낼 때 주의하라고요. 제 차로 태워서 등교시키는데,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요. 한동안은 새벽 4시에 일어났어요. 차를 꼼꼼히 검사했죠."

- "누가 묻더군요. 그렇게 살해 협박을 많이 받는데도 어떻게 계속 발언을 하냐고요. 여기는 자유 국가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잖아요. 저는 목소리라도 전달하고 싶어요. 실제로 살해당하고 실제로 타겟이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요." 

- "저는 행복한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시아파고 저는 수니파라 모두 반대했지만, 사랑하고 모든 걸 함께 하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결혼하기로 결심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 커다란 인권 문제. "저는 인권 활동가로 사는 게 매우 외로운 길임을 깨달았어요. 이슬람 여성 인권을 위해 움직이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죠." / "유엔 인권 이사회엔 누가 있는지 아세요? 리비아 대표가 있고, 이라크 대표도 있더군요. 자기네 나라에서 벌어지는 그런 거대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 "우리 모두 손을 잡아요. 할 말이 있어요. 연대합시다. 이렇게 각 분야의 활동가가 모인 것처럼, 모이면 힘을 합칠 수 있어요. 세계에 알리고 도움을 청합시다."

- 번호 41518로 문자를 보내면 $10가 후원된다. 후원금은 이 영화를 상영하는 데 쓰인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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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중 1부 가사노동과 임금 중

3장 〈부엌에서 만든 대안〉 발제문

 

신은 24시간 대기하는 전일제 무보수 만능 심부름꾼이라는 농담이 있다. 신의 손길은 몰라도 가정을 수호하는 손길은 흔히 보이는데, 수많은 여성들이 벽난로 앞의 천사로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는 만능 하인 노릇을 맡아온 덕이다. “엄마, 오늘 저녁 뭐야?”, “엄마, 내 티셔츠 못 봤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자기야, 오늘 저녁 뭐야?”, “자기야, 좋았어?” 이러한 봉사는 너무나 중요하고 신성한 영역이기에 가사노동, 감정노동, 재생산 활동은 감히 자본주의 생산구조의 일익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이처럼 생산이 인지되지 않는 노동,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가치한 노동을 전담하는 여성 노동자는 무용한 존재로 취급된다. “우리 엄마 집에서 놀아요.”, “하는 건 돈 쓰는 일밖에 없으면서.”

 

[혁명의 영점]1부는 가사노동의 임금투쟁을 다룬다. 3장은 원래 여성과 가사노동에 대한 보수라는 좌파 이론가 로페이트의 글에 대한 반론이었다. 페데리치의 혁명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임금투쟁을 통한 여성해방과 이로 인한 노동자 전체의 자유. 이는 노동과 노동계급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자본주의의 임금체계 밖에서도 대가를 주장하며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의 글로 유추하건대 로페이트의 글에는 임금을 중심으로 노동-비노동, 생산-기생, 잠재력-무력함을 나누는 이분법이 등장한다. 여기서 여성은 진정한 노동계급이 아니라 노동자 이전의 상태에 있기에 우선 자본을 통해 조직되어야, 즉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페데리치가 반박하기를, 여성은 이미 노동자다. 여성이 떠맡은 노동력 생산 노동이 임금을 못 받는 부불노동이라 무시될 뿐이다. 사회는 아이와 함께 놀러간다는 활동을 노동이 아니라 엄마의 여가라고 부르는 식으로 가정 내 여성의 노동에 투명 망토를 씌운다. 현재의 ()가족, 돈 버는 가장과 집을 돌보는 아내라는 역할분담은 안정된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근대의 창조물이고, 여성부불노동을 제도화하는 현대의 노예제다.

 

설령 여성이 가사분담을 하고 맞벌이를 하더라도, 집 밖으로 나가 임금노동자가 되더라도, 여전히 집안일과 애보기가 여성의 영역으로 취급된다는 점과 노동시장이 여성에게 가정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일자리 혹은 남성 대비 70%의 임금만을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여성은 경제력과 발언권에서 약자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 임금노동자는 반찬값을 버는 사람이고, 결혼한 남자들보다 먼저 해고할 대상이다. 반면 주업인 가사노동에는 아무도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에 누구도 이 노동량과 생산량을 재지 않는다. 가치가 없어서 부불노동이 된 게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여자는 노동계급에 기생하는 비노동계급이라는 비난을, 여성은 바로 그녀들이 길러내는 노동력에게 듣는다. 남자들이 힘들게 번 돈을 펑펑 써대는 속편한 여자들이라는 짜릿한 피해의식의 기원이다.

 

가사노동에 임금을!”은 노동자들이 제 삶을 찾는 데 다방면으로 기여한다. 당장의 경제력은 빈곤=여성의 공식을 깨는 비상탈출용 망치가 될 것이며, 이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넘겼던 목소리를 돌려줄 것이다. 계급투쟁을 위해 단결하라는 좌파의 정언명령은 대표성 획득에 실패한 이들의 발언권을 거두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노동자는 단일체가 아니라 (무임금을 포함해) 임금으로 규제 및 분할되고, 임금격차는 다시 성별이나 인종이나 지역 등으로 배분된다. 노동계급 중에서도 노동계급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댈 건 도덕성이 아니라 힘이다. 자본-노동 관계에서 임금은 권력이기도 하므로, 소외되었던 집단은 임금을 통해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목표는 임금이 아니다. 가사노동의 생산성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가사노동 임금투쟁은 세계 절반이 부당 착취를 당해왔다는 폭로이며, 어차피 착취할 거라면 돈이라도 내놓으라는 뜻이다. 따라서 경제주의적이라는 좌파의 비판은 틀리다. 임금투쟁은 임금상승 요구에 국한되지 않으며, 목표는 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다. 가사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변하면 가정마저 자본에 종속되리라는 지레짐작도 부적절하다. 임금이 노동자를 길들이는 당근과 채찍인 건 사실이지만 무임금이라고 채찍에서 자유로운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해방은 여성만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별은 더 나은 노동자와 더 불리한 노동자를 가르는 여러 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여성의 임금투쟁은 남성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착취구조를 향한 노동자들의 자기주장이다. 결국 그 열매는 제값을 못 받는 모든 노동자의 몫이다. “우리 투쟁의 목적은 이 노동을 종식시키는 것이며”, “가격표를 다는 일은 그 첫 단계이다.

 

다만 가사노동의 임금투쟁에서 전체 노동해방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는 저자가 확신하는 만큼 명확하지 않다. 흑인 남성의 자유가 백인 여성의 자유로 이어지지 않았듯, 어느 한 부문의 해방이 곧바로 전체의 진보가 되리라는 기대는 낭만적이다 못해 이상적이다. 그래도 저자가 한발 물러나 제시하는 안전망은 믿음직하다. 임금은 곧 권력이니 임금투쟁의 성과는 권력으로 돌아온다. 이는 적어도 물질적 기반, 더 큰 투쟁을 위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길이다. 누구 말마따나,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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