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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의 러시안 룰렛

대담 2015. 9. 10. 22:30

  특정 성별과 부정적 특성을 결부해 비하하는 어휘를,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애용할까, 라는 의문에 대해.


  낙인을 찍고 꼬리표를 달고 이름을 써붙이는 행위가 주는 안도감 때문 아닐까.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리뷰에 관련된 말이 나온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당시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을 달아야 한다는 가시적인 구별이 행해지자 "별을 달지 않은 이들은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불안전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이익은 전혀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고통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고, 유대인의 곤경은 주민 누구에게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분리된다. '김여사'의 운전솜씨를 욕하는 남자는 그런 '개념없는' 운전을 오로지 '여사'들의 몫으로 돌림으로써 여사가 될 수 없는 자신을 공격 대상에서 빼낸다. 여성을 괴물이라고 지목하면 이를 지목한 남자는 인간의 범위 안에 머무르게 된다. 특정 범위만을 지정하는 어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어린 양의 피 같은 수호부 역할을 한다. 신실하고 가련한 이들이여 대문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 스스로를 보호할지어다. 역병은 이 표식을 보고 너희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갈지니.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것, 굳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도 '남성은 폭력적이며 여성은 무해하다'는 성역할 이분법을 전제로 남성 일반을 공격한다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 어떤 경계선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유대 민족이라는 경계선이 학살을 정당화할 수가 있을까?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눈감아버리면 비논리적이든 부당하든 경계선은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폭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끌어오는 경계선을 받아들였던 독일에서는, 결국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공유될 수 없다는 좌절감 속에서, 반대로 폭력에서 안전하게 분리된 자들은 그것이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안도감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발적으로 지워버"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차이를 전시하여 피해를 면하려는 움직임은, 경계선 밖 대상으로 지목당한 소수자들 안에서도 일어난다. '김치녀'로 공격받는 위험에 처한 여자들이 반사적으로 자기는 '김치녀'가 아니라 '개념녀'임을 증명하려 힘쓰는 것처럼. 여성이라는 범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 부족하나마 '그런 여자'와 '나'를 구분하는 방어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는 특정 성별과 부정적인 특성을 결부해 비하하는 방식에 정당성을 쥐어주는 일이다. 폭력의 부당함을 지적하기보다 그것이 끌어오는 경계선 안쪽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일은 결국 폭력을 추인하는 셈이다. "어떤 유대인이 자신은 독일인 공동체로 돌아가 직업을 얻을 '차이점과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때, 그는 그런 차이점이 없으면 격리와 절멸의 조치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듯이. 성별 관련 비하와 홀로코스트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둘의 '경계선 긋기'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지목당하는 이들에게는 꼬리표가 달리지만 지목하는 자들은 이름이 없다. 그들은 지목당하는 개개의 집단을 제외한 '그외 전부'인 집단이다. 그래서 지목하는 이들은 언제나 다수의 입장에 선다. '그외 전부'니까. 그들은 실체가 없다. 소수자들의 이름표는 공고하고 강력하게 유지되는 반면 '그외 전부'라는 안티테제+비실체는 매우 임시적인 지위다. 이쪽에 속했던 개인들은 언제든지 이름이 지목되는 순간 곧바로 안전한 익명의 그림자에서 쫓겨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정체성과 이름을 가진다. 국적. 인종. 질병. 성별. 장애. 경제수준. 직업. 고용계약. 주거. 가족. 지역. 어떤 것도 언제든지 호명될 수 있다. 분리당할 집단은 임의로 정해진다. 그 러시안 룰렛에 공통점이 있다면 지정-낙인-퇴출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인용문은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리뷰>.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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