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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28 앤 패디먼, <다시 읽기에 대해>

http://www.amazon.com/Rereadings-Seventeen-writers-revisit-books-ebook/dp/B0052Z3I0C/ref=tmm_kin_title_0?_encoding=UTF8&sr=8-3&qid=1417162071

* []는 저자 주, 괄호 안의 *는 역자 주

* 단행본은 『』, 개별 작품은 「」, 간행물이나 영화는 〈〉로 표시

* 시와 대사 번역은 임의로.

  

『Rereadings: Seventeen writers revisit books they love』 (Sep. 5, 2006) 중,

머리말: 다시 읽기에 대해

 

앤 패디먼

 

내 아들이 여덟 살일 때, 그 애에게 C. S. 루이스의 『말과 소년』을 읽어주었다. 나는 그 책을 여덟 살 때 처음 혼자서 읽었고, 그동안 '나니아 연대기'의 더 유명한 책들, 『사자와 마녀와 옷장』, 『마법사의 조카』, 『은 의자』 등은 다시 읽었지만 『말과 소년』을 읽은 지는 40년이 넘게 흘렀다.

좋아하는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것은 매우 즐거운 방식의 ‘다시 읽기’로, 아이가 당신만큼 책에 열정이 있을 경우, 당신의 문학적 취향과 부모로서의 자부심과 과거의 당신 자신 모두가 만족스럽게 입증된다. 헨리는 『말과 소년』에 푹 빠졌다. 『말과 소년』은 말할 줄 아는 두 말과 두 아이의 이야기로, 그들은 북쪽에 있는 왕국이 위험에 처하자 왕국의 몰락을 막으려고 장애물이 위협하는 사막을 뚫고 질주한다. 이건 나니아 연대기 중 가장 긴장감 넘치는 책이며, 헨리는 부모가 취침 시간을 반길 때 안타까워하고 그러면서도 곧 혼자 남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나이였기에 매일 밤마다 아직은 불을 끄지 말라고 내게 애원했다. 한 쪽만 더, 그리고 한 문단만 더, 그리고 또, 아이 참, 한 문장만 더는 안 돼요? 이 목가적인 풍경에는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나는 헨리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속으로 C. S. 루이스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인종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 돼지새끼라고 생각했다.

나는 루이스의 전기를 두 권 읽었고, 그가 여자들과 형성한 관계는 아홉 살 때 죽은 어머니를 포함해 꽤나 기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성 혐오가 담긴 오싹한 판타지 『황량한 땅(The Shoddy Lands)』에서는 화자(남자)가 여자 거인을 맞닥뜨릴 때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 구역질을 한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기로 『말과 소년』은 헨리 마거리트의 『신커티그 섬의 안개』처럼 그저 신나는 승마 모험담이고, 다만 신커티그처럼 ‘조랑말 수영 대회(Pony Penning Day)’를 여는 대신 칼싸움을 할 뿐이다. 하지만 루이스가 책의 여주인공 아라비스를 높게 인정한 이유를 깨달았을 때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남자애처럼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활과 화살과 말과 개와 수영’에 열을 올리고 옷도 남자애들처럼 입는다. ‘드레스와 파티와 뒷소문’에 열중하는,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소녀다운 소녀가 입는 옷과는 대조적이다. 루이스가 악당을 다루는 방식은 더 충격적이다. 악당들은 갈색 피부에 시미터를 휘두르며 ‘칼로르멘’이라고 불린다. (40년 전, 나는 대략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다른 단어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혹시 루이스가 기후를 염두한 것은 아닌지 잠깐 고민했으나 - 칼로르(calor)는 라틴어로 ‘열’을 뜻한다 -, 그럴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중국인 등장인물의 이름을 노랭이(*Mr. Yellow)라고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도적인 이름이다.) 책의 주인공 섀스타는 칼로르멘인 악덕 어부의 노예이지만, 방문객은 섀스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소년은 당신의 아들이 아닌 게 명백하군요. 당신의 볼은 나만큼 검지만 이 소년은 창백하고 하얗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가 남쪽의 상스러운 인종이 아니라 북쪽의 고귀한 인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칼로르멘의 수도는 뚱뚱하고 역겹고 탐욕스레 보석을 두른 티스록 황제가 다스리는 곳인데, 루이스는 그곳을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이 그곳에 간다면 알아차릴 것이라고는 안 씻은 사람들, 안 씻은 개들, 향수, 마늘, 양파, 곳곳에 놓인 쓰레기 더미에서 온통 피어오르는 냄새밖에 없으리라.”

이런 종류의 글을 헨리에게 읽어주면서 한마디 하지 않기는 어렵다. 어쨌건 그 단어는 내 목소리로 전달되니까. 나는 첫 백 장 정도까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소리치고 말았다. “너 『말과 소년』이 여자애들에게는 정말 불공평하게 군다는 거 알겠니? 그리고 나쁜 놈들은 모두 피부가 검다는 것도?”

헨리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니에요. 티스록은 나쁜 놈인데 C. S. 루이스는 그가 검다고는 안 했어요.”

“그래. 그는 칼로르멘이고 모든 칼로르멘들은 검어. 당연히.” 나는 내가 더듬기 시작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50년 전에 이 책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틀린 생각을 갖고 있었지. 남자애들은 여자애들보다 낫고, 혹은 백인은 흑인보다 낫고, 또…”

헨리는 내가 초콜릿 아이스크림 통에 식초 한 통을 떨어뜨렸다는 듯이 쏘아봤다. 누가 그 애를 탓하겠는가? 그 애는 책에 대한 분석, 비평, 평가, 설명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책을 이리저리 재보거나 딴죽을 걸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애는 내가 8살 때 원했던 바로 그것을 원했다. 섀스타와 아라비스가 제 시간에 아치랜드에 도착해 룬 왕에게 사악한 왕자 라바다시(*Rabadasy)가 이백 명의 칼로르멘 기사들을 끌고 왕성을 공격할 거라고 경고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엄마.” 그 애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냥 읽어주면 안 돼요?”

헨리와 내가 동시에 했던, 그냥 읽기와 다시 읽기의 핵심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전자는 더 빠르다. 후자는 더 깊다. 전자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책 안의 세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후자는 이야기를 가늠해보느라 책 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전자는 비교적 더 재미있고, 후자는 더 비판적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후자가 전자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이중 초점 렌즈의 상위 반쪽, 성인의 복잡한 시각으로 책을 보면서도 동시에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 그때는 책을 칼로르멘과 아치랜드를 가르는 ‘구부러진 화살’ 강처럼 빠르고 맑게 읽었다.

 

8년 전 문학 계간지 〈아메리칸 스칼러〉의 편집자가 되었을 때, 내가 처음에 결정해야 했던 문제는 도서 관련 지면을 꾸리는 방법이었다. 물론 우리는 신간에 대한 평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모든 진정한 독자에게는 아직 만나지 못한 책 외에 이미 친숙한 책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존중할 수 있을까? 시인 오스틴 돕슨이 1908년에 말했듯이, 새로운 책은 “우리 과거의 추억이나 생각과 별로 관련이 없다. 우리였던 것, 우리가 좋아하거나 좋아했던 것을 그 책들은 전혀 모른다. 하물며 우리가 그 책들을 모른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해결책은 매우 명백해서 나는 왜 모든 잡지가 이렇게 하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책을 읽었다는 글만이 아니라 오래된 책을 다시 읽은 글에도 도서 지면을 열어두었다.

그렇게 우리의 ‘다시 읽기’가 태어났다. 〈스칼러〉에서는 매번 특정한 사람이 스물다섯 살 이전에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받은 책을, 혹은 이야기나 시나 어떤 경우에는 음반 표지를 고르고, 그걸 서른이나 쉰이나 일흔에 다시 읽는다. 글쓴이가 사랑하는 대상은 유명하거나 혹은 무명일 수 있다. 추앙받는 고전이거나 인기를 끌었던 쓰레기일 수 있다. 어릴 때 읽은 동화거나, 첫사랑의 날카로운 아픔에 읽은 소설이거나, 경력 초기에 지침이 되었던 참고서일 수 있다.

‘다시 읽기’는 즉각 우리 잡지에서 제일 인기 있는 기획이 되었다. 이는 아마도 글쓴이들이 전통적인 문학 비평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관계에 대해서 썼다. 독자와 책 사이에 형성되는,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는 유대에 대해서였다. 열다섯 살에는 지혜의 샘처럼 보이던 책이 오십 살에는 찌꺼기만 남은 웅덩이로 보인다. 반면에 한때는 무의미하거나 불가해했던 구절이 삶의 경험을 통해 부스러기에서 황금으로 변한다. 다시 읽기가 거듭될수록 책에 관한 것뿐 아니라 독자들 자신의 모습도 드러났다. 각 글은 마음에 전류를 흐르게 한 주제, 솟아오르는 본연의 사랑에 대한 작은 회고록이다. 몇 십 년이 흐른다 해도 글쓴이 중 상당수가 책 표지의 원래 색깔, 그들이 앉았던 의자, 책을 읽었던 당시의 계절과 시간대를 기억하리라. 물론 그들은 기억했다. 당신도 첫사랑과 함께 누웠던 방, 침대가 놓인 방식, 시트의 색깔, 베개가 부드러웠는지 딱딱했는지 기억하지 않는가.

이 책(*『Rereadings』)은 내가 매우 좋아하는 열일곱 편의 다시 읽기를 실었다. 훌륭할 뿐만 아니라 제각각이라서 좋아하는 글이다. 글쓴이는 모두 미국인이지만 그들은 각기 다섯 국가에 살고, 그들이 쓴 책은 여덟 국가에서 나왔다. 그들의 관점, 문체, 그리고 유머 감각은 마치 발렌시아가 브랜드 드레스의 천 조각에서 찢어진 청바지의 천 조각까지 모아 바느질한 누비이불처럼 다양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 자꾸만 달아나는 목표물, 읽기의 본질을 쫓아간다. 이들을 같이 읽으면, 책장에서 책을 한 번만 뽑는 독자가 어째서 베토벤의 교향곡 공연에 한 번 가고 다시는 듣지 못하는 청취자처럼 불우한 사람인지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다시 읽기로는 견줄 사람이 없는 뛰어난 독서가인 홀브룩 잭슨에 따르면, 알렉산더 스코트 목사는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을 네 번 읽었다.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를 다섯 번 읽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알렉산더 포프가 번역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적어도 스무 번은 읽었다. 1928년 런던의 〈타임즈〉는 “‘에즈먼드’(*새커리의 『헨리 에즈먼드』)를 스물다섯 번은 읽어야 가입할 자격이 생기는” 협회가 있다고 보도한다. 나는 새커리를 매우 훌륭히 여기는 관계로, 협회의 구성원들이 수확체감(*투입이 선을 넘으면 한계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을 겪었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처음 순간은, 특히 어릴 때였다면 더욱 되돌아오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로 아이들은 책을 부어넣는 그릇이라지만 나는 반대가 더 정확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책에 부어넣으며 각 그릇에 맞는 모습으로 변한다. “나는 톰 존스였어"(*헨리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 데이비드 카퍼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한 로드릭 랜덤(*스몰리트가 쓴 『로드릭 랜덤』)이었고, 한 쌍의 낡은 신발 모형 장식물로 무장했으며, “영국왕립해군의 아무개 선장, 야만인들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결사 항전하여 장렬히 전사하리라 다짐했다.” 우리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을 때 문학 속 정체성을 덮어써보는데, 처음에는 비현실적이다가 나중에는 점점 일상에 가까워진다. 난 몰 혹은 토드(*『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여섯 살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때는 크기나 인종 같은 자질구레한 사항에 구애되지 않았다. 여덟 살에도 성별은 여전히 장벽이 아니었다. 아라비스 혹은 섀스타? 열여섯 살, 도로테아 혹은 로자몬드(*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나는 이게 수많은 아이들이 픽션을 선호하고 수많은 어른들이 논픽션을 선호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딱딱하게 굳는다. 우리의 모습은 고정되고 더 이상 부어넣지 못하게 된다.

『톰 존스』는 윌리엄 해즐릿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시 읽기에 관한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에세이인 “오래된 책 다시 읽기”에서 해즐릿은 이렇게 쓴다.

그것은 2주에 한번 나오는 간행물인 쿡(*미국의 금융업자 제이 쿡(1821-1905)의 이름을 땀)의 문고판으로, 잘리고 윤색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내가 읽은 것이라고는 교과서와 지루한 기독교 역사서뿐이었다(레드클리프 여사의 『숲 속의 낭만』은 제외하고). 그러나 여기에는 전혀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입에서는 꿀 같이” 달았는데도 “배에서는 쓰게 되는”(*요한계시록 10:9) 것도 아니었다. 이 책은 내가 살던, 그리고 내가 살아야 했던 세계를 후려쳤다.

『톰 존스』가 영어 수업 과제물이 아니라 최고로 흥미진진한 도피용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근사한지! 해즐릿이 언급한 판본은 6펜스짜리였고 연재물로 나와서 그를 그야말로 “문장 중간에, 이야기 틈에, 톰 존스가 장막 뒤에서 광장을 발견한 장소에” 매달려 있게 두었다. 그게 책이 처음 출판된 지 사십삼 년 후인 1792년이었으니 해즐릿은 열네 살이었을 테고, 그 나이면 특정 종류의 똑똑함이나 상상력이 생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이 불행한 아이들은 친구들과 지내기보다 그의 서재 속 인물들과 더 어울리게 된다. 그는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다. 문학으로 인한 기쁨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강해진다. 해즐릿은 이를 완벽히 이해했다.

한 현자가(그리 현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말하기를, 만약 그가 쌓아온 경험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다시 젊어지는 것을 틀림없이 매우 즐길 거라고 했다. 발언의 심각성을 보아하니 이 멍청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젊음의 크나큰 이점은 경험의 무게를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짐을 젊음의 어깨 위에 태연히 얹을 텐데, 그런 짓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절대 늦지 않다. 아! ‘기독교도의 짐’ 같은 이런 혹을 등에서 내려놓는 일이, 그리고 자그맣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륙판[문고본]의 도움을 받아 “무지는 축복”이던 때로, 픽션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가 세상의 난장판(*raree-show)을 처음으로 엿보던 때로 옮겨가는 일이 얼마나 특별한 권리인지.

어린아이의 그 장점 때문에 문학 속 난장판은 종종 삶 자체보다 더욱 생기가 넘쳐 보인다. 아마도 이는 수많은 어린 독자들이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에 더 관심을 품는 이유일 것이다. 작품의 꾸며낸 부분을 생각하면, 혹은 제빵사가 치즈 데니쉬 빵을 찍어내듯 잘 팔리는 문장을 대량 생산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등장인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아이들은 이를 잘 알지만, 자꾸 의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저 없이 기독교도의 짐을(출처는 『천로역정』으로, 주인공인 기독교도는 등에 진 무거운 짐을 버리지 않는다) 짊어질 것이다.

 

이른 나이에 책에 취해 황홀해지는 경우의 문제는 후에 다시 읽기가 실망스럽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날카롭고 감미로운 맛, 순수한 향기는 날아가고 말았다.” 해즐릿은 이렇게 쓴다. “그리고 문학의 줄기, 기울, 쭉정이만이 남는다.” 무서운 말이지만 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점점 더 마음이 움직이기가, 공포에 질리고 놀라고 자극받고 신경이 곤두서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당신의 교양은 심문실의 눈부신 전등이 되어 어느 불운한 책의 모든 사마귀와 흉터를 드러내고 숨겨둔 잘못을 털어놓게 할 것이다. “내 등장인물들은 목석이야! 내 이야기 구조는 삐걱거려! 나는 반쯤 페미니스트고, 반쯤 해체주의자고, 반쯤 포스트식민주의자야!” 등등. (영어 수업의 긍정적인 면은 우리에게 비평의 도구를 쥐어준다는 점인데, 그 상당수는 유용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그 도구들 때문에 당신의 책에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붓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바로 그 조건들 말이다.) 당신은 다른 책을 너무 많이 읽고, 그 각각의 점수를 낮게 매기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읽기란 환멸, 낙심, 상실의 경험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물론 아니다. 때때로 책이 훌륭해서 친근함이 흐려지기는커녕 깊어질 때도 있다. 그것은 앵무조개의 껍질처럼 (*피보나치 수열을 그리며) 늘어나고, 당신이 자랄수록 같이 자라난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야, 『전쟁과 평화』는 두 번째 읽으니까 좀 짧더라.” 혹은 단순히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책이 너무 어려워서 힘들었을 수 있다. 내가 처음 읽은 셰익스피어 희곡은 열두 살 때 본 「한여름밤의 꿈」이었는데, 나는 주어와 동사의 위치를 찾아내느라 녹초가 되었고 플롯이나 인물처럼 세부사항을 들여다볼 여력이 없었다. 혹은 처음 시도에서는 당신이 그 책을 잘못 받아들였을 수 있다. 열세 살 때 로버트 브라우닝의 「내 전처 공작부인」을 읽었을 때는, 나는 화자가 자기 아내를 죽였는지 몰랐다. 그건 시의 전체 요점이지만 마치 투명 잉크 같아서 오로지 다시 읽기에서만 알아볼 수 있었다. 혹은 어쩌면 그 책이 당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것, 다시 말해 사랑, 부모의 마음, 소명 등에 대한 것이라 힘들었을 수 있다. 당신이 그걸 15년 후에 다시 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리창에 코를 들이미는 것밖에 없다.

다시 읽기의 강력한 동기 하나는 순전한 자기만족이다. 그건 당신이 한때 좋아했던 것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래된 문고본, 이미 한참 전에 당신에게는 걸맞지 않게 된 손글씨로 여백에 적어둔 주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책을 열면,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연 것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뛰어오른다. 해즐릿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책 기억은 “우리가 윤리적 상상의 옷가지를, 우리의 가장 소중했던 애정의 유품을, 우리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의 증표와 기록을 원하는 대로 걸어두거나 꺼내보는 못걸이며 고리다.” 혹은 우리가 불행했던 때도 그렇다. 다시 읽기는 당신을 과거의 성실한, 불안한, 가식적인, 당황스러운 당신 자신, 당신이 예전에 벗어두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내내 당신 안에서 함께 살아왔다고 밝혀진 자신과 함께 밀실공포증을 유발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어릴 때 읽은 책이 연인이라면, 나중에 다시 읽으면 그 책은 친구가 된다. “친구 중의 친구”, 빅토리아 시대 예술가 윌리엄 제임스 린턴은 이렇게 썼다. “그것은 사이가 멀어지거나 공격할 수 없으니 / 무시당하더라도, 멋대로 돌아온다 / 오래된 우정과 함께”. 강등시키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결국 그건 오래된 친구이지 연인이 아니며, 안정이 필요할 때 당신이 가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다. 피로, 우울함, 아픔은 친숙함을 요하지 참신함을 찾지 않는다. 독감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을 때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이봐, 나는 아프간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어! 강황이 잔뜩 뿌려진 걸로 배달시켜 보자!” 당신은 치킨 수프를 갈망한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은 익히 알고 있는 책을 갈망한다. 아마도 약간 유치한 책이 편안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일을 지지해줄 것이다. 책장에서 『제인 에어』를 꺼내라. 제인은 완벽한 손님이다. 그녀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훌륭하고, 그녀와의 대화는 부담스럽지 않으며, 행복한 결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당신의 회복을 위한 모범이 된다.

그러나 취약한 시기에 다시 읽을 글이 언제나 간단하고 발랄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메리칸 스칼러〉에서 출간을 맡았던 알프레드 카진은 죽기 네 달 전 내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끝맺었다.

어제, 광포하고 싸늘한 폭풍우와 싸우는 것처럼 나의 팔십이 년 묵은 몸뚱이와 고투하느라 상심하여, 나는 결국 집에 돌아가 하디의 시를 집어 들고 읽으며 홀로 기력을 회복했는데, 이는 사람을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체계로 회귀하도록 하는 그의 재능 덕분이다. 거짓된 낙천주의는 없고, 그는 다만 유려한 발음의 단어들로 진실을 대비할 뿐이었다.

하디? 그런 상황에서라면 나는 아마 더 쾌활한 동료를 골랐을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보다는 말이다. “우리는 늙었다. / 이런 젊음은 짓누른다. 우리는 궤멸을 느낀다. / 보조적인 보금자리로 긴급히, / 저녁의 어둠은 퍼져 가니, / 신사 분들!” 그러나 나는 카진이 원했던 친구가 바로 하디였으리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짧게 언급했던 헨리와 나의 말싸움 뒤에도 『말과 소년』을 읽느라 몇 주가 지났다. 책의 일부는 매우 아름다웠다. 섀스타가 고대 왕들의 무덤에서 밤을 보내는 장면, 다치고 지친 아라비스가 남쪽 국경에 사는 현자의 돌집에서 헤더 침대에 누워 지낸 날, 나는 그 현자가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거대한 싸움을 중계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룬 왕과 칼로르멘 군대 아즈루는 가까이에서 치고받으며 싸웠지. 왕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왕은 그 상태를 잘 유지했고, 이겼지. 아즈루는 쓰러졌어. 에드문드 왕도 쓰러졌고. 아니, 다시 일어났지. 그는 라바다시 왕자가 가져온…” 어떻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어도, 나는 섀스타가 어릴 때 유괴되었던 왕자라고 밝혀지는 장면을 음미한다. 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해소되는 곳에, 여성혐오보다는 참신한 반낭만주의로 보이는 장면에 매료된다. “아라비스는 또 [섀스타와] 수많은 말싸움을 벌였지만(긴장된다, 심지어 수많은 싸움이다), 그들은 언제나 다시 화해하곤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뒤에도 싸우고 다시 화해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결국 둘은 결혼하여 이후로도 더 빈번하게 싸움을 벌였다.”

C. S. 루이스는 여전히 여자아이들과 칼로르멘을 열등하게 다루지만, 나는 이를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은 그가 편협하다는 논리가 책에서 얻는 기쁨과 힘겨운 씨름을 벌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넘길 쯤에는, 헨리가 약간씩 부추기기도 해서,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기쁨 쪽이 명백한 우위에 있음을 알았다. 책에는 심각한 결점들이 있지만 우리 관계는 잘라내기에는 너무 강하다.

그리고 왜 꼭 잘라내야 하나?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에서 시작하지만 우리는 이내 그들이 불륜을 저지르거나 술을 퍼마시거나 혹은 탈세를 저지르거나 어쩌면 무대 위에서 어색해 보이거나 이야기할 때 너무 오래 말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길 그만두던가?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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