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를 살아낸다는 것" 알라딘 인문학 스터디 시즌2
- 엄기호, 노명우, 류동민 (사회: 박태근)
2015. 2. 12. 목요일 저녁 7시반, 정동 프란체스코회관 410호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7152
류동민: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218125



* 개인 기록용.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 아니라 표현 등은 정확하지 않으며 해석이 들어가 있음. 문장은 임의로 '-다'로 마무리.
* 강조 표시는 개인적으로.




1. 자기 책에 대한 한마디

노명우: ("반지하 자취방 냄새가 나는 책"이라는 평에 대해)
- 학자가 되려고 한 공부였다. 그럼 사회학자란 뭘까 고민했다. 세속의 언어와 학계의 용어를 연결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왜 전문용어는 서양 학자가 쓴 개념의 번역인지 의문을 품었다. 그건 자극제는 되겠지만 전부는 아니다. 학자가 만들어내는 전문용어에서도 한글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 이전 책에 비해 무엇을 위해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가 많이 바뀌었다. 내가 발 딛은 한국 사회에 대해 썼다. 사회학자가 되려면 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제일 쉬운 방법인,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벗어나서 내 생각을 해보자는 의도에서 썼다.

류동민: ("서울에 산다는 것"에 대해)
- 나는 이론경제학자이고, 실제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수치 쓰고 그래프 그린다. 그보다 사람의 언어로 말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변화한 서울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서울에 돌아와보니 많이 변했더라.
- 언어는 정확하게 표현을 하지 못한다. 이론경제학은 아주 정확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정확한가. 정확한 표현을 하려고 끝까지 추적하는 사람이 있다. 프루스트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김훈의, "칼이 울었다"는 문장이 더 정확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글이 불투명해졌고, 그래서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반응도 받았다. 한번 떠오르는 대로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사회과학은 정확한 표현을 하려고 추적하는 쪽이지만, 과연 그게 다인가 싶다.

엄기호: ("이번 책은 세상의 끝을 다 끌어안은 듯...")
- 성장에 관심이 있다. 교육은 결과를 나의 대상에게 다 맡겨놓는 것이다. 그건 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끔 기적이 일어난다. 가르침, 배움, 성장이 관심사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배움이 일어난다. 혼자 배우지는 않는다. 왜 이렇게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가. 배움, 갱신이 일어나야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학자인 듀이의 "연속성" 개념처럼. 그런데 다 파편화되고 뚝뚝 떨어져서 "단속"된다. 개념 만드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박사논문 쓰느라 개념을 새로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 구호에,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게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사람은 선배들의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다. 그건 단절이 아니라 반복이다. 그렇지 않은 게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극복, 돌파로서의 단속이 왜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 강연 같은 거 할 때마다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 언제는 10분도 안 되어서 일어나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대안을 요구받을 때마다 사람들이 정답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서나 적용되는 모델을 보여달라, 한번에 모든 게 해결 가능한 모델을 바란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한다.



2. 한국 사회를 ㅇㅇ사회라고 이름 붙이려는 마음에 대해. 그리고 각 전문 분야에서는 어떻게 연구를 하는지.

류동민:
- ㅇㅇ사회란 말은 출판사에서 상업성을 고려해서 붙이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단어로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라벨링을 하면 고려하지 못하는 면들이 생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보면, 키워드 하나로는 정리되지 않는다. '피로사회'라고 해도 피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다. 두 층 사이에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공간, 왜 그런지 이야기를 해볼 연결지대가 필요하다.
- 경제학에서 사회 분석을 하면 당분간 '불평등'이 키워드 아닐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덕분에.

엄기호:
- '사회'를 책 제목에 넣는 걸로 출판사와 싸웠다. 사회가 없다는 내용인데 어떻게 제목에 사회라는 말을 넣나. 그런데 친구가 '단속'이라는 말에 이미 사회가 없다는 뜻이 있으니 써도 괜찮겠다고 하길래, 묘하게 설득돼서 넣었다. 한국의, 개념 한두 개로 스냅샷 찍듯 전체를 포착하려 하는 경향이 보인다. 사회에 대해서는, 시간성 등의 차원으로도 볼 수 있는데, 공간성을 주로 묻는다. 공간성, 특히 "전국적"(부정적인 어감으로 쓴다), 국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지역, 동네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 학회에 소속되질 않아서 인류학, 문화학이 어떻게 연구하는지는 모른다. '학자들은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 학자들의 말은 쉬운 것이다. 공부하면 알 수 있다. 칸트도, 책 보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공부하면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말의 영역에 진입한 것이고, 로고스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뭐라고 부를까, 민중의 말이 어렵다. 나는 질적 연구를 하니까 인터뷰를 한다. 가장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교사들인데, 교사들도 녹취 풀어보면 횡설수설한다. 특히 자기 고통에 대한 부분은 말이 말로 되지 않는다. 말의 세계, 로고스에 진입하지 않는다. 그건 소리다. 고통은 소리로 표현된다. 그래서 알기 어렵다. 계속 반복해서 들어보고, 같이 지내보고, 그래야지 알 수 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목소리를 말의 세계에 진입시키는 게 저희랄까, 제가 하는 일이다.

노명우:
- 사회과학의 한계점이 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비판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을 날카롭게 보려는 학생들이 있다. 다만, 그게 냉소주의와 결합해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학대와 자기연민까지 연결된다. 그걸 들으면 어느새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게 된다. 냉소주의에서 좀 벗어나라는 마음에 하는 말인데, '세상을 더 따뜻하게 보면 안 되겠니...?'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뭐야. 예전에 컴퓨터에 편집자도 모르는 비밀 폴더가 있었다. 나도 ㅇㅇ사회라는 글을 쓰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ㅇㅇ사회라는 말과 멀어졌다. 사회의 문제에 집중하고 이를 진단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수십 개가 나온다. 삶에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진단에서 그치면 냉소가 된다. 진단을 할수록, 진단이 많을수록 무기력해진다. 비판을 지향한다. 비판이란, 진단에서 출발한다 해도, 문제 제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본다. 제가 해온 것도 주로 진단의 영역이었지만, 진단보다 비판이 결코 쉽지는 않다.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냉소적이지 않은 긍정과, 이를 낭만에 그치게 하지 않는 힘이 필요하다. ㅇㅇ사회라는 진단에서 벗어나서 비판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글 쓰던 폴더도 지워버렸다. 편집자님 이거 끝나고 그거 무슨 내용이었냐고 묻지 말아주세요.



3. 청년들에 대해.

엄기호:
- 원래 공부 중이던 주제다. 청년들의 과격화, 급진화(Radicalization of Youth)에 대해서다. 이 주제 연구는 예전부터 있었다. 얼마 전 샤를리 앱도, 이슬람 테러 등. 이게 왜 그렇게 충격이었냐면, 자유의 상징이었던 언론사가 공격받았다는 것도 있지만, 그 테러를 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국에서 건너온 이민자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서구적,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다. 범인 이웃들 인터뷰를 보면 '장애인(본인)에게 특히 친절한', '이웃에게 예의바른'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왜일까. 자국민 교육의 실패라고 파악한다.
한국은 어떤가. 이들이 서구에서는 인구학적으로 구분된다. 한국에서는 인구학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구분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는 청년들이 무기력으로 과격화된다. 그런 짤 있지 않나. "더욱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더욱 적극적으로, 과격하게 무기력하려 하기에 무언가를 한다. 여러분도 그래서 이런 데 오는 거잖아요.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으니까 무기력해진다. 세상을 고쳐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붕괴해야 한다고, 리셋해야 한다고 바란다. 설문에서 43%가 한국사회에 "붕괴"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청년들이 무기력 속에서 어떻게 과격화되고 있는가, 이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 혁명이 오는 거냐, 아니다. 386세대 등은 전후사회에 재건과 변혁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 날려버리고 싶다는 쪽인 거다. 이건 극우적일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할수록 무기력해지는 현상과 맞물린다. 특히 노동할수록 가난해지는 현상과.

노명우:
- 저는 84년 대학에 입학하고, 88년에 졸업하고, 바로 90년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80년대를 온전히 대학가에서 보냈다. 386세대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알고 보면 왜곡이 많다. 당시에는 1년 내내 술을 마시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울었다. 80년대에는 80년대의 방식으로 무기력했다. 시간이 지나서, 87년 6월항쟁 등 사건으로 정리된 걸 보니 기억이 달라진다. 나는 그때 롯데백화점 매대에서 우산을 샀다. 혹시 전경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 우산이나 사는, 우산이 도움이 되리라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기억은 다 사라지고, 지금은 나에게도 6월 10일이 영웅적인 무엇처럼 기억된다.
- 세대마다 운명이 다르다. 운명이다. 당시에 20대였던 때문에 겪은 경험들이 지금 내 운명을 만들었다. 다른 시기에 다른 곳을 겪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외국으로 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이 자리에 붙박인 이유는 그때 20대라 겪은 경험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대마다 특징이 다르다. 그 특징을 알고 언급하는 건 중요하고, 각자가 어떤 운명에 처해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것뿐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넘어가면 할 말이 사라진다. 어떤 세대도 틀리지 않다.
- 'ㅇㅇ사회'라는 말처럼 '세대'라는 말도 안 쓰려고 하는데. 지금의 청춘들만이 아니라 각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한다.

류동민
- 이사하느라 대학 1학년 때 일기를 찾았다. 노명우 선생님과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 있었는데, 짝사랑에 실패했을 때 일기다. 보면 술 얘기와 그 여자애 얘기 뿐이다. 80년대 군부독재 이런 얘기 없다.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 사람은 줄을 세울 수 없지만, 경제학이니까, 돈이라는 건 줄을 세울 수 있다. IQ는 불가능하지만 돈은 사람을 가르고 줄세울 수 있다.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할 수 있음 없음이 정해진다. 90년대까지는 변화의 여지가 많았다. 생활 수준이나 사회 분위기는 지금보다 나쁘더라도, 하려면 할 수 있다는 여지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면에서 획일화, 고정되었다. 태어남 - 학교 - 취업 - 주거 지역 등이 이른 시점부터 갈라지고, 다른 쪽으로 갈아타기가 힘들다. 2 트랙 사회라고 하겠다. 나이가 드니까 자식 이야기도 하게 되는데, 자기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절망적이지만, 자기 때문에 자식들도 위치가 결정된다는 게 절망적이다.
- 사실 전공이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희망 주기 힘들다. 냉소는 한계에서 일탈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지속되다 보면 힘이 없다. 그건 2 트랙 사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 내에 압축 성장한, 긍정적인 힘이 있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는 거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쪽과 냉소하는 쪽으로 나뉘는 것 같다. 냉소하는 쪽은 계속 냉소할 건가. 변화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쪽이다. 그런 점에서 절망적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4.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노명우:
- 지금 마흔아홉 살이다. 아마 벚꽃 필 때쯤 가장 감성에 젖지 않을까 싶다. 40대의 마지막 벚꽃놀이구나.
- 절망, 파국, 붕괴, 이런 단어가 그냥 말이 아니라 이제는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추상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의 엄중함이 느껴진다. 노스탤지어라든가 그런 말을 전에는 이론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체감한다. 이미 반환점을 넘긴 나이다. 백 살까지 살 거 아니면 이미 어느 샌가 넘어왔다. 그러니까 남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게 있다. 몇 가지 태도를 정했다.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20대는 리셋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방에 일변할 무언가. 그때 리셋 열망이 강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은 변화의 불가능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낭만적인 기대를 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궁극적 유토피아가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오면 뭐하겠나. 지금보다 더 나아진, 의미가 있는, 그런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이걸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려 한다.

류동민:
- 마르케스인가, "주변에 지나는 사람들이 다 나보다 어린 것을 발견했다"는 문장을 썼다. <러브 스토리> 영화에서 연인들보다 아버지 말에 이입된다. 사랑이 뭐라고, 그러다 헤어지면, 왜 그렇게 목숨을 걸어. 그게 맞다는 건 아닌데, 살아보니 그렇더라. 나이가 들었다.
- 전에 <변호인>과 <국제시장>을 봤다. 나야 <변호인>에는 감동할 만반의 준비를, <국제시장>은 딸 때문에 보면서 잔뜩 경계할 준비를 했다.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접점이 점점 사라지면서 더 미개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변호인>에도 왜곡이 있다. 주인공이 여공들에게 국어책 읽어주다가 잡혀가는데, 그 정도로 잡아갈 정도로 국가기관이 멍청하지 않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아도 분명히 잡아갈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왜곡을 보며 관객 절반은 감동할 테고 절반은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 사람은 기억, 경험이 쌓이는 것이다. 자기의 기억을 특권화해서 거기에 갇혀 산다. 남들은 틀렸고 자기 기억이 맞다고 믿는다. 바뀔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건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경험이 많이 쌓이면 더 완고해질 수는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입은 무겁게, 지갑은 가볍게라고 하던가. 나도 이야기하며 내 생각, 기억을 계속 특권화해서 강요하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마저도 자기는 안 변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계속 바뀌는 건데.

엄기호:
- '곱게 늙자'가 어릴 때부터 인생 모토였다. 늙었구나 하고 느낀 게 전경, 군인을 봤을 때다. 무섭다는 이미지도 있고 해서 나이가 많다고 느꼈는데, 이제 보니 아저씨가 아니라 애들이 서있더라.
- 나이가 드니 곱게 늙기가 쉬워 보였다. 마흔 넘어가니까 화를 내면 피곤하더라. 전처럼 화난다고 화내면 하루 자야 한다. 근데 곱게 늙는 걸 방해하는 게, 몸에 병이 난다.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날카로운 분이었는데, 아파서 내는 짜증이었구나 싶다. 작년에도 병원비 많이 냈다. 노년을 이해할 때, 사회나 정치 이런 게 아니라 몸의 문제를 봐야 한다. 병 나는 게 얼마나 사람을 좌우하는지 모른다. 이걸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떤 몸으로 살 것인지, 몸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 우리 사회는 병 권하는 사회다 보니 아프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아픈 건 삶의 문제다. 외국에서는 약 처방 잘 안 해준다. 아프다고 해도 약 안 주고 상태를 보자고 하고. 아프냐 안 아프냐가 아니라 얼마나 어떻게 아프냐도 봐야 한다.



5.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설문에 많은 분들이 답을 해주셨는데, 공통된 말들이 나왔다. 공감, 배려, 고려는 없는데 시선에는 민감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회다. 세 분의 책에도 공감, 연대, 공공, 이런 단어들이 나온다.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삶의 태도.

류동민:
- 남을 생각하는 사회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의 "공감" 개념이 있다. 그에 기반해 시장도 사회도 돌아가는 것이다. 연말정산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노했는가. 정부에서 바로 대책을 내놨다. 사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분노하게 만든 요인들이 있었다. 연봉 5500이면 중산층이라고, 7-8천이면 잘 산다고 자기들의 기준을 밝혔다. 그런데 연봉 5500인 사람이 4인가족 가장이고 혼자 벌며 서울에 산다고 가정하면, 벌어서 남는 게 없다. 평균은 저 앞에 앞서서 떨어져 있는데 나는 닿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회가 성장해도 무의미하다.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다.
- 실험실 쥐들. 좁은 곳에 부대끼면 스트레스 받고 공격적이 된다고. 한국, 서울도 그렇다. 좁은 공간에 짧은 시간만에 부대끼게 되었다. 여유 없다. 공감 못 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 그럼 이제 대안 이야기가 되는데, 대안은 없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해줘야 한다. 광주를 보자. 내 또래에는 광주에 가본 적 한 번도 없어도 말만 들어도 눈물 흘리던 이름이다. 30년이 지나니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 공감한다. 정치인들이 감정이입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말해줘야 한다. 정치인이 그러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한 것이겠고, 그럼 우리가 공감 문제에 말을 해야 한다. 가해자에 공감하지 말고.
이게 어느 정도 양적 변화가 쌓여야 질적 변화가 일어날 텐데. 나는 80년대에 군사 정부가 계속 갈 줄 알았다. 그래서 당시 저항하고 투쟁하던 사람들을 존경한다. 마르크스 한마디 더 끌어오면, 유토피아는 어디 그려진 이상향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계속 지양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해가면서 향하는 것이다.

엄기호:
- 배움의 기쁨이 중요하다. 날 지탱해주는 것이다. 이 망한 세상에 어떻게 살 것인가 했을 때, 남은 기쁨이다. 프란체스코 교황도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배움이 기쁘다는 건 선생이 가르쳐줄 수 없다. 자기가 깨우치는 것이다. 공부는 그걸 알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부는 기쁨의 주체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가다로 작동한다. 공부는 내가 아는 척하고 세상에 떠들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푸코가, 어느 그리스 정치인이 "너는 평생 폴리스를 돌보느라 널 돌보지 못했다"는 데 이야기하는 게 바로 배움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기쁨을 누가 가르쳐주지는 못해도 초대는 할 수 있다. 내가 왜 공부하는가, 그걸 전환할 필요가 있다. 듣는 것은 비판, 냉소, 까기, 조리돌림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들으면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폴리스도 돌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기쁨을 생각한다.

노명우:
- 사람의 위대함과 비루함이 같이 있는 것처럼, 삶도 살아낸다는 것과 살아지는 게 있지 않나. 내가 벗어 던지려는 태도가 몇 있는데, 아까 거 말고도, 과거 좋았던 시절을 미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재가 우울하다 보니 90년대를 마치 벨 에포크였던 것처럼 만들어내고 있는데, 누구에겐 7-80년대 끔찍했던 시대가 벨 에포크일 수도 있다. 좋았던 시절을 불러내는 데 익숙해지면 노스탤지어에 젖는다. 그런 사람의 진폭은 위험한 신호를 낼 수 있다. 이걸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과거를 떠올리기보다 지금을 보려 한다.
- 내가 변하는 속도와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다르다. 내가 변하는 게 제일 쉽다. 행위자가 많아질수록 변화는 힘들다. 세상 전체가, 인류가 변하는 건 개인의 변화에 비하면 불가능 수준이다. 그러나 인류의 변화가 불가능하다 보인다고 해서 내가 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내 주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변화가 있다. 한국사회가 통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변화가 의미가 없느냐. 전체 아니면 0이라고 한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통째로 변하는, 리셋을 생각하는 태도와도 거리를 두려 한다.
- 연대는 도덕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너무 거룩해서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희생해야 하니까. 이기적인 관점에서 출발해보자. 나는 자유롭고 싶다. 표현의 억압에서, 환경 오염에서, 구타에서 자유롭고 싶다. 개인들의 이런 이기심에서 출발하면 우리가 거룩한 위인이 되지 않더라도, 또 우리가 가진 사회의 여러 차원을 생각하면, 타인과 공통의 연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의 연대를 생각한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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