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의 러시안 룰렛

대담 2015. 9. 10. 22:30

  특정 성별과 부정적 특성을 결부해 비하하는 어휘를,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애용할까, 라는 의문에 대해.


  낙인을 찍고 꼬리표를 달고 이름을 써붙이는 행위가 주는 안도감 때문 아닐까.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리뷰에 관련된 말이 나온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당시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을 달아야 한다는 가시적인 구별이 행해지자 "별을 달지 않은 이들은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불안전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이익은 전혀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고통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고, 유대인의 곤경은 주민 누구에게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분리된다. '김여사'의 운전솜씨를 욕하는 남자는 그런 '개념없는' 운전을 오로지 '여사'들의 몫으로 돌림으로써 여사가 될 수 없는 자신을 공격 대상에서 빼낸다. 여성을 괴물이라고 지목하면 이를 지목한 남자는 인간의 범위 안에 머무르게 된다. 특정 범위만을 지정하는 어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어린 양의 피 같은 수호부 역할을 한다. 신실하고 가련한 이들이여 대문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 스스로를 보호할지어다. 역병은 이 표식을 보고 너희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갈지니.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것, 굳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도 '남성은 폭력적이며 여성은 무해하다'는 성역할 이분법을 전제로 남성 일반을 공격한다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 어떤 경계선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유대 민족이라는 경계선이 학살을 정당화할 수가 있을까?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눈감아버리면 비논리적이든 부당하든 경계선은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폭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끌어오는 경계선을 받아들였던 독일에서는, 결국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공유될 수 없다는 좌절감 속에서, 반대로 폭력에서 안전하게 분리된 자들은 그것이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안도감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발적으로 지워버"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차이를 전시하여 피해를 면하려는 움직임은, 경계선 밖 대상으로 지목당한 소수자들 안에서도 일어난다. '김치녀'로 공격받는 위험에 처한 여자들이 반사적으로 자기는 '김치녀'가 아니라 '개념녀'임을 증명하려 힘쓰는 것처럼. 여성이라는 범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 부족하나마 '그런 여자'와 '나'를 구분하는 방어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는 특정 성별과 부정적인 특성을 결부해 비하하는 방식에 정당성을 쥐어주는 일이다. 폭력의 부당함을 지적하기보다 그것이 끌어오는 경계선 안쪽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일은 결국 폭력을 추인하는 셈이다. "어떤 유대인이 자신은 독일인 공동체로 돌아가 직업을 얻을 '차이점과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때, 그는 그런 차이점이 없으면 격리와 절멸의 조치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듯이. 성별 관련 비하와 홀로코스트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둘의 '경계선 긋기'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지목당하는 이들에게는 꼬리표가 달리지만 지목하는 자들은 이름이 없다. 그들은 지목당하는 개개의 집단을 제외한 '그외 전부'인 집단이다. 그래서 지목하는 이들은 언제나 다수의 입장에 선다. '그외 전부'니까. 그들은 실체가 없다. 소수자들의 이름표는 공고하고 강력하게 유지되는 반면 '그외 전부'라는 안티테제+비실체는 매우 임시적인 지위다. 이쪽에 속했던 개인들은 언제든지 이름이 지목되는 순간 곧바로 안전한 익명의 그림자에서 쫓겨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정체성과 이름을 가진다. 국적. 인종. 질병. 성별. 장애. 경제수준. 직업. 고용계약. 주거. 가족. 지역. 어떤 것도 언제든지 호명될 수 있다. 분리당할 집단은 임의로 정해진다. 그 러시안 룰렛에 공통점이 있다면 지정-낙인-퇴출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인용문은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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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Fall in Love with a Reader, Do This

책 읽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려면, 이렇게 해봐요.

http://www.themillions.com/2015/04/to-fall-in-love-with-a-reader-do-this.html


Several months ago, The New York Times published an essay about a 36-question interview devised to make strangers fall in love. The questions presented here are designed with a more modest goal: to have an interesting conversation about books. But, be warned: if you talk about literature with someone for two hours, there’s a chance you’ll become a lot closer.

몇 달 전, <뉴욕 타임스>에 낯선 사람들끼리도 사랑에 빠지게 하는 36개의 질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기에 제시되는 질문들은 더 겸허한 목적을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책에 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죠. 하지만 명심하세요. 만약 다른 사람과 문학에 관해 두어 시간 이야기하고 나면, 한층 더 가까워질 틈이 생길 거예요.


Part 1.

1. What was your favorite book as a child?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책이 뭔가요?

2. What’s the last really good book you read?

최근 읽은 것 중 가장 좋았던 책은요?

3. Do you prefer fiction or nonfiction? Why?

픽션, 아니면 논픽션? 왜요?

4. Do you finish every book that you start? If you don’t, how do you decide when to stop reading?

한번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나요? 아니라면, 그만 읽을지 언제 결정하나요?

5. List your 10 favorite books in four minutes or less. Write it down because you’ll revisit it at the end.

4분 안에 좋아하는 책 10권을 꼽아봐요. 이따 마지막에 고칠 거니까, 손으로 적어가면서요.

6. Do you reread books? Which ones?

읽었던 책을 다시 읽나요? 어떤 걸요?

7. Do you read poetry? Why or why not?

시를 읽어요? 왜, 혹은 왜 아니에요?

8. Do you remember the first “grown-up” book you read?

처음 읽었던 '어른용' 책을 기억하세요?

9. Are there any authors whose work you have read completely?

작품을 전부 읽어본 작가 있어요?

10. How often do you read books that are more than 100 years old?

100년도 넘은 책들을 읽는 건 얼마나 돼요?

11. Is there a type (or types) of book you never read?

절대 읽지 않는 종류의 책이 있어요?

12. How do you choose what to read?

뭘 읽을지 어떻게 정하나요?


Part 2.
13. What’s more important to you: the way a book is written, or what the book is about?

어떤 게 더 중요해요? 책이 쓰여진 방식과 책이 다루는 주제 중에서요.

14. What author, living or dead, would you most like to have dinner with?

살아 있든 사망했든, 저녁식사를 가장 함께 하고 싶은 작가는 누구인가요? 

15. If you could hang out with a literary character for the day, who would it be?

등장인물과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누구를 택하겠어요?

16. If you could be a literary character, who would it be?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면, 누구인가요?

17. Have you ever written a fan letter to an author?

작가에게 팬 레터 써본 적 있어요?

18. Is there any book that, if I professed to love it, you would be turned off? Is there any book that would impress you in particular?

어떤 책이든, 내가 정말 좋아한다고 공언하면 신경 끄게 될 책 있어요? (반대로) 특별히 인상을 남길 책 있나요?

19. Is there a book you feel embarrassed about liking?

좋아하기엔 당황스러운 책 있어요?

20. Are there books you feel proud of liking or having finished?

취향이라는 게, 혹은 다 읽었다는 게 자랑스러운 책이 있나요?

21. Have you ever lied about having read a book?

책 읽어온 것에 거짓말 해본 적 있어요?

22. Do you keep track of the books you read?

읽은 책을 기록하나요?

23. How do you form opinions about what you read?

읽은 것에 대해 어떻게 관점(/의견/소신)을 갖추나요?

24. What authors do you think are overrated? Underrated?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하는 작가는요? 과소평가로는?


Part 3.
25. Do you ever read self-help books?

힐링 책(/자기계발서) 읽은 적 있어요? (*self-help book: 주로 개인적인 문제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침을 제시하는 책) 

26. What’s a book that shocked you?

충격받았던 책은?

27. If you could force every person you know to read one book, what would it be?

당신이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읽으라고 강요할 책이 하나 있다면, 무엇인가요?

28. What book would you recommend to me in particular?

특히 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요?

29. What books/authors have you been meaning to read for years? Why haven’t you read them yet?

오랫동안 읽으려고 생각만 해온 책/작가는? 어쩌다 아직 못 읽었어요?

30. What kind of book do you consider “a guilty pleasure?”

"길티 플레저"라고 생각하는 책은 어떤 종류인가요?

31. Has a book ever changed your mind about something?

뭔가에 대해 당신 생각을 바꿔놓은 책이 있나요?

32. If you were terminally ill, what book or books would you read?

위독한 상태가 된다면, 어떤 책 혹은 책들을 읽겠어요?

33. Do you have any passages of poetry or prose committed to memory? Can you recite something to me?

기억에 새겨진 시나 산문 구절이 있나요? 뭐든 제게 암송해줄 수 있을까요?

34. If you could change anything about the way you read, what would it be?

읽는 방식을 뭐든 바꿔본다면, 어떻게 해보겠어요?

35. Was there any time in your life when you felt as if a book guided you in a profound way?

살면서 책이 당신을 심오한 방식으로 이끌어주는 것 같다고 느낀 때가 있었나요?

36. Return to the list you made at the beginning. What titles, if any, would you change after our conversation?

처음에 만들었던 책 목록으로 돌아가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뭐든, 바꾸고 싶은 제목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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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ire>에 실린 앤 패디먼 인터뷰. 그녀가 읽는 것들에 대해 썼다.

Anne Fadiman: What I Read
NICOLE ALLAN
앤 패디먼: 내가 읽는 것들
니콜 앨런


다른 사람들은 마구 쏟아져 내리는 정보의 물살에 어떻게 대처하는 걸까? 뭔가 비법이라도 있나?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자신들의 미디어 다이어트를 설명하는 데 능통할 것 같은 여러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조언을 청하는 중이다. 이 글은 앤 패디먼과의 대담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수필가이고 기자이며 예일대의 ‘프랜시스 우수작가(Francis writer)’ 프로그램을 전속으로 맡아 거기서 논픽션 글쓰기를 가르친다. 1997년 출간된 패디먼의 책 <리아의 나라>는 국제도서비평협회의 상을 받았다.


나는 대부분의 뉴스를 인쇄본으로 보는데, 활자 매체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이다. 종이의 느낌과 인쇄물의 냄새는 설령 매우 잘 만들어진 웹사이트라 할지라도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매사추세츠 서쪽 구석의, 너무 작아서 <뉴욕 타임스> 배달도 안 되는 마을에 살고, 그래서 내 남편은 그걸 가지러 매일 아침 주유소에 간다. 나는 <타임스>에 파블로프 반사를 보이게 되었다. 그 신문 없이는 커피를 넘기기가 힘들다. 또 매일 아침, 조지는 개와 함께 도로로 나가 배달된 <데일리 햄프셔 가제트>를 가져온다. 지역 소식은 중요하다. 지역의 단풍 설탕 제조 산업에 대한 기후 변화의 영향을 다룬 <가제트>의 머리기사가 아니라면, 올해는 조지와 내가 왜 시럽을 그렇게 조금밖에 만들지 못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뉴요커>, <하퍼스>, <아틀란틱>, <소비자 보고서>(누구든 이것 없이 어떻게 진공청소기를 사겠는가?)를 구독한다. 우리는 <하버드 매거진>도 보는데, 우리가 졸업한 곳이고 내가 작가 생활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달에 25불을 받고 학부생 칼럼을 썼는데, 70년대 초에는 한 재산 되어 보이는 돈이었다.

내가 매일 훑어보는 유일한 웹사이트는 <고등 교육 연감>인데, 거기서 내게 이메일을 보내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칼러>의 편집자일 때는 주로 인쇄본으로 받았는데, 그 종이책들은 내 사무실 바닥에 위태롭게 쌓여있었다. <계간 래펌>과 <캐비닛>은 내가 구독하지는 않지만 간혹 읽어보고 또 매우 감탄하는 계간지다.

나는 또한 학부생들의 정기 간행물을 읽는 데 끔찍하게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 전문 분야가 망했다는 공포를 누그러뜨릴 똑똑하고 젊은 기자 한 무더기 같은 건 없다. 나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 예일에서 수업을 하고, 예일에서는 식당 외의 모든 곳에서 무료 인쇄가 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한손 가득 <YDN 매거진>(내가 감수한다), <뉴 저널>, <해럴드>, <리트>를 들고 나와서 매사추세츠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읽는다. 학부생들의 도서 비평지인 <크리틱> 창간호도 고대하고 있는데, 내 학생들 몇 명이 편집에 참여한다. 개중 최고는 <예일 데일리 뉴스>(YDN)다. 감독 위원회와 회의하러 하버드로 가는 달에는 매번 머무르는 동안 <크림슨>을 읽었다. 내가 하버드 학생이었을 때는 <크림슨>이 <YDN>보다 나았는데, <크림슨>은 여전히 훌륭하긴 하지만 요즘은 <YDN>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중독되어 있긴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는 거의 보지 않는다. TV로 뉴스를 보는 일은 워싱턴에 있는 친구가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정치 현안을 따라잡으며 미국사를 이해하는 것, 그건 중고품을 들여다보며 유행을 파악하는 것과 같아.

나는 어떤 블로그도 구독하지 않는다. 사람이 컴퓨터를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게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수면생리학자가 당신의 침실을 수면 이외의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라고 제안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다. 나는 컴퓨터로 쓰고 편집하고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건 무척 경이롭다.

잠시 온라인 신문에 대해 불평해도 괜찮을까? 이 경우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된다는 건 알지만(*이 글은 온라인에 게재되었다), 나는 온라인 기사가 위험할 정도로 편협해질까봐 걱정스럽다. 종이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그들이 관심사라고 여길 것들을 보려면 그 전에 수많은 국제 기사를 지나야만 한다. 그들은 적어도 기사 제목을 힐끗 보기라도 하고, 아마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 몇몇은 읽어볼 것이다. 갈수록 온라인 기사 제공처는 사람들이 각자 보려고 마음먹었던 기사만 제공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스포츠나 유명인들을 검색한다면 이런 내용이 위에 뜰 것이다. 자체 검열로 인해 미국인은, 이전에도 충분히 무식했는데도 더 무식해지고 있다.

사실 이런 우려 때문에 온라인에 비해 TV 뉴스가 상당히 좋아 보인다. 그건 대부분의 신문보다 피상적이지만, 만약 당신이 프로그램 끝의 날씨를 보길 원한다면 당신은 자리에 앉아 앞에 나오는 것들을 모두 봐야 하고, 아마도 마지막에는 원했든 아니든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이름 정도는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미래에는 TV 뉴스 시청자들이—만약 살아남는다면— 가장 세계적으로 적응한 시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차에서 항상 NPR(*미국공영라디오, National Public Radio)을 듣는다. NPR에 너무 빠진 덕분에 혹 어느 때든 NPR을 듣게 되면 일정이 엉망이 된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차에 있을 때면 나는 어느 주파수에서 지역 NPR 방송이 들리는지 몰라 다이얼을 위아래로 미친듯이 돌린다.
 
한때는 침대 옆 탁자에 거의 20여 권의 책을 놓았다. 진짜 책들. 킨들이 아니라. 그러나 개중 상당수는 반갑기만 한 책은 아니었다. 광고문 등을 부탁받은 책이었다. 그 책을 전부 읽지는 않았다. 물론 시험 기간에는 주로 학생들의 글을 읽지 책을 읽지는 못한다. 수업용 책은 별개인데, 그 책들은 이미 20번도 더 읽었더라도 매년 다시 읽는 것들이다.
 
내 친구인 리스 해리스가 말해준 적이 있는데, 그녀가 <뉴요커>의 전속 기자였을 때 윌리엄 쇼운(*전 뉴요커 편집장)은 전속 기자들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걸 탐탁찮아 했는데, 학생들의 미숙한 문장 때문에 기자들의 스타일이 오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학생들의 과제물이 내 능력을 개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가 되는 건 확실히 아니며, 나는 가르치는 데 강한 기쁨을 느낀다. 그건 적어도 글쓰기만큼 창조적이다. 그리고 내 학생들 중 몇몇은 그 나이대의 나보다 훨씬 낫다.
 
나는 픽션과 논픽션 양쪽을 다 좋아한다. 내 취향은 까다롭지 않다. 이안 맥이완과 제인 스마일리가 낸 새 소설들은 내가 읽으려고 이번 여름에 고대했던 책이다. 나는 존 업다이크를 그리워한다. 또 자서전과 문학 관련 매체에도 열광한다. 존 맥피의 최신간은 내 침대 옆 탁자에 놓여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나의 영웅이다. 조안 디디온과 이안 프레저도 마찬가지로 내 목록 최상위에 올라 있다. 게이 탈레스는 여전히 현업이고 여전히 매혹적이다. 나는 의학 쪽 글에도 관심이 있기 때문에 <뉴요커>에서 아툴 가완드의 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아담 고프닉도 찬양한다. <뉴요커>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문을 싣는다. <뉴요커>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는 할복해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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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재료를 옮겨 적고, 글쓰기를 시작해라. 멈추지 마라. 매일 해라.


1월

1일 누군가 바람을 피웠다
2일 어느 금요일 밤
3일 당신은 마당에 있다
4일 벽들은 눈물의 색깔
5일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마크 스트랜드의 작품에서)
6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써라
7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
8일 수평선에서
9일 별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것들
10일 침묵의 소리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The sound of silence에서)

11일 잠에 대해 써라
12일 먼 곳에서
13일 그녀가 올려다봤을 때...
14일 친숙하지 않은 소재에 대해 써라
15일 '램프와 촛불의 빛'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에서)
16일 날개를 펴는 장소
17일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것
18일 곁눈질에 대해 써라
19일 그녀의 머리칼은 붉은 색이었다
20일 '시계에 없는 움직이지 않는 시간' (보들레르의 작품에서)

21일 작별 인사에 대해 써라
22일 당신은 텐트 안에 있다
23일 자정 무렵
24일 여름날의 정원에 대해 써라
25일 누군가 자고 있다
26일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27일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 대해 써라
28일 차를 몰고 해안도로 일주하기
29일 '나는 이역만리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앙리 미소의 작품에서)
30일 할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1일 미처 하지 못한 말


2월

1일 그녀의 단추가 풀려있었다
2일 문틈으로
3일 누군가 시를 읽고 있다
4일 나만의 비밀에 대해 써라
5일 '비탄에 잠긴 자의 악기' (스테판말라르메의 시에서)
6일 증오에 대해 써라
7일 외식
8일 그가 ...을 하면서 살던 시절이었다
9일 그(그녀)의 호흡을 세어보기
10일 아침에 잠에서 깨는 순간

11일 자갈이 깔린 길을 운전하기
12일 일식에 대해 써라
13일 쌍안경으로 본 것들
14일 누군가 휘파람을 불고 있다
15일 꿈속에 동물이 나왔다
16일 보석
17일 빼앗긴 순간들에 대해 써라
18일 과일 따기
19일 훔친 물건들
20일 '모든 것은 그림자가 되었다' (랭보의 시에서)

21일 오후의 그림자에 대해 써라
22일 연인의 베개에 대해 써라
23일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24일 나는 외국에 와 있다
25일 장거리 버스 여행에 대해 써라
26일 옷장 안에서
27일 '다리를 건너면서...'
28일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29일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써라


3월

1일 '침을 바른 새빨간 입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에서)
2일 한밤중 듣는 블루스 곡
3일 내일의 얼굴
4일 누군가 당신에게 한 거짓말
5일 '진흙처럼 걸쭉한 기억' (재닛 피치의 작품에서)
6일 '창가의 여인' (로저 에이플론의 작품에서)
7일 아버지의 눈에 대해 써라
8일 텅 빈 거리의 끝에서
9일 안개 사이로 보이는 것
10일 장례식 전날

11일 당신이 태어나기 전
12일 외로움이란 이런 느낌이다
13일 예식에 참석하기
14일 밖에서 자는 것에 대해 써라
15일 '이것은 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매혹적인 목소리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서)
16일 침몰에 대해 써라
17일 비상구
18일 저녁 만찬
19일 결혼식 전날에
20일 가족 식사에 대해 써라

21일 1인용 침대
22일 한밤중의 색소폰 소리
23일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기
24일 끝맺음에 대해 써라
25일 '처음 그녀를 봤을 때...'
26일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27일 당신은 옷을 벗고 있다
28일 황혼녘의 지평선
29일 작은 좌절감을 느꼈을 때
30일 뒷자리에서
31일 진통제


4월

1일 전화 주문에 대해 써라
2일 뜨거운 바람에 대해 써라
3일 낯선 사람이 마을에 도착했다
4일 어느 여름날의 정사에 대해 써라
5일 당신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
6일 늦은 밤이었다
7일 촛불 시위
8일 사소하지만 후회되는 일들
9일 "죽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 (도로시 앨리슨의 작품에서)
10일 그녀는 전 재산을 날렸다

11일 지도 위의 한 장소에 대해 써라
12일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13일 지나간 슬픔에 대해 써라
14일 '마지막으로 거절당한 후에...' (월러스 스티븐스의 시에서)
15일 '속삭임의 역사' (폴 사이먼의 시에서)
16일 파티에서 이런 사람을 만났다
17일 아버지의 자부심
18일 빙판에 대해 써라
19일 당신은 왕복 2차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20일 '어둠은 오후 3시에 찾아온다' (로버트 블라이의 시에서)

21일 별들이 일직선으로 떠 있을 때
22일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 써라
23일 그 일요일 오후에...
24일 검은 날개를 가진 나방
25일 그것은 여백에 적혀 있었다
26일 아침에 떠오른 아이디어
27일 '새 짐으로 이사를 갔을 때...'
28일 토요일 밤에 대해 써라
29일 그(그녀)의 인상
30일 '이 말은 꼭 해야겠어...'


5월

1일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것이다
2일 엄마는 말씀하셨다
3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4일 나는 달에 홀려 그 일을 하고 말았다
5일 그녀(그)는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몰았다
6일 비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7일 피어나는 꽃에 대해 써라
8일 무엇이 당신을 웃게 만드는가
9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
10일 갑작스런 적막에 대해 써라

11일 당신은 공연장에 있다
12일 그녀는 멕시코에 숨어 있었다
13일 나는 달밤에 태어났다
14일 남의 말을 엿듣는 중이다
15일 뒤를 돌아보는 것에 대해 써라
16일 동이 트자마자 잠에서 깨어
17일 그것은 카드에 적혀 있다
18일 소풍에 대해 써라
19일 그림에 대해 써라
20일 계단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21일 당신을 울린 것
22일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23일 자고 있는 아이에 대해 써라
24일 번개에 대해 써라
25일 '한밤중, 퍼플 와인에 취해' (게오르그 트라클의 작품에서)
26일 그녀는 기도를 드렸다
27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28일 '그날 밤 나는 행복했다'
29일 밤의 색깔
30일 첫 경험을 써라
31일 붉은색 자동차


6월

1일 벽장 뒤쪼에서
2일 그녀는 방에 혼자 있다
3일 '그는 모든 두려움을 사양한다' (피에르 레버디의 작품에서)
4일 지금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5일 검은 드레스에 대해 써라
6일 세계가 잠든 사이에
7일 고백할 게 있다
8일 '어딘가 파리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세자르 바예호의 작품에서)
9일 철도 선로를 가로질러
10일 소나무가 자라는 곳

11일 첫 번째 등불을 켜고
12일 낮잠에 대해 써라
13일 그것은 화요일에 도착했다
14일 '우리가 ___에 살던 시절에'
15일 원 안에서
16일 깨진 약속에 대해 써라
17일 이것은 내 아버지의 이야기다
18일 모직 숄에 대해 써라
19일 2층 창문에서 내다본 풍경
20일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정거장

21일 그녀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22일 주말에 비가 내렸다
23일 이발에 대해 써라
24일 이탈리아인 구역에서
25일 '내가 죽을 때 무엇이 나와 함께 죽을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26일 불면에 대해 써라
27일 나의 가능성에 대해 써라
28일 이것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손이다
29일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다
30일 안개를 뚫고 운전하기


7월

1일 우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2일 야간열차를 타고
3일 나는 방향을 잃었다
4일 그녀는 머리에 꽃을 꽂았다
5일 3일 동안 비가 내렸다
6일 부러진 뼈에 대해 써라
7일 예전에 __에 살았던 기억이 있다
8일 12월의 어느 어두운 날
9일 실망했던 일들
10일 '오직 여기, 오직 지금' (루실 클리프턴의 작품에서)

11일 그녀가 품고 있는 환상
12일 밤새 깨어 있었다
13일 과거에 방황하고 길을 잃었다
14일 흑백사진
15일 '내 배신의 목록' (토니 호글랜드의 작품에서)
16일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17일 그녀는 야간 비행기를 탔다
18일 밤바람에 대해 써라
19일 이것이 그녀(그)의 몸의 지도다
20일 오렌지와 사과

21일 설명하려고 노력하기
22일 '결국 우리는 죽음을 위해 기도했다'(마크 카의 작품에서)
23일 그녀는 전화해도 좋다고 했다
24일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에 대해 써라
25일 우리는 그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26일 낯선 길로 접어들기
27일 '나는 원래 다른 누군가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다.' (필립 르바인의 작품에서)
28일 멀리서 뭔가 움직인다
29일 옷 갈아입기에 대해 써라
30일 우리가 돌아왔을 때...
31일 '무작위로 나열한 나쁜 습관들' (루이스 젠킨스의 작품에서)


8월

1일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일 이런 대가를 치렀다
3일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의 세부 사항들' (레반 쉰들러의 작품에서)
4일 선한 의도 뒤에 가려진 것들
5일 그것은 가족 이야기였다
6일 꼭대기에서 바라본 전망
7일 모든 것은 의미를 지닌다
8일 '꿈속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었다.' (토마스 스미스의 작품에서)
9일 물 위에 비치는 빛의 모양
10일 그것은 시작도 끝도 아니다

11일 '그럼에도 아직은 여름이다' (찰스 라이트의 작품에서)
12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
13일 당신이 아끼는 것
14일 '혼자 오셨어요?' 그가 물었다
15일 그림자의 이동
16일 '수면의 무게' (W. S. 머윈의 작품에서)
17일 자고 일어나니 그가 사라졌다
18일 현관 앞에서
19일 당신이 믿고 싶은 것
20일 담배연기에 대해 써라

21일 집의 건축적 특징
22일 서류가방을 챙기는 중이다
23일 겨울의 공기 냄새
24일 희미해지는 풍경을 써라
25일 '불가능한 빛을 찾아서' (라리사 스즈폴럭의 작품에서)
26일 교차로에 서 있는 이방인
27일 재앙이 몰아닥칠 것 같은 예감
28일 그가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29일 금지된 것을 써라
30일 뼛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
31일 그들은 소곤거리고 있다


9월

1일 '심지어 번개조차도 그들을 좋게 평가했다.' (W. S. 머윈의 작품에서)
2일 그(그녀)가 당신에게 춤을 청했다
3일 무엇이 깨졌는지 써라
4일 우리는 해가 지면 외출한다
5일 외로움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6일 '만약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면...' (기기 마크스의 작품에서)
7일 신비한 경험에 대해 써라
8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써라
9일 '집을 떠나 살면서...'
10일 그녀가 갈망하는 것의 목록

11일 '육체의 달콤 씁쓸한 가을' (메이 사튼의 작품에서)
12일 나는 지하에 숨어 있었다
13일 그녀는 쪽지를 남겼다
14일 거짓말 모음집
15일 '집은 저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야니스 리초스의 작품에서)
16일 어딘가 다른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지나쳤던 마을들
17일 짜증나는 일에 대해 써라
18일 갈망의 풍경
19일 '외워서라도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이 있다' (헨리 쿨레트의 작품에서)
20일 '우리가 친해지고 난 후에'

21일 불같은 언어로 써라
22일 '저녁의 소리가 내 정신을 고양시킨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작품에서)
23일 그것을 지하실에 보관해 두었다
24일 훔친 차를 몰고 운전하기
25일 내가 말하려고 한 건 그게 아니었다
26일 샤워에 대해 써라
27일 '외로움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힐 때' (메리 올리버의 작품에서)
28일 거절에 대해 써라
29일 물이 피부에 닿는 느낌
30일 오렌지 껍질 까기


10월

1일 '서서히 완성되는 밤' (데이비드 세인트 존의 작품에서)
2일 잊혀진 것
3일 해무의 냄새
4일 근거 없는 소문에 대해 써라
5일 욕조 안에 몸을 푹 담글 때
6일 우연의 일치
7일 그(그녀)가 자란 환경은...
8일 가을의 추억
9일 더 이상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때
10일 살짝 제정신이 아닌 상태

11일 '분노의 은밀한 역사' (일라 카민스키의 작품에서)
12일 내 뒤에 남기고 온 것
13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써라
14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15일 내 별명에 대해 써라
16일 버림받는 것에 대해 써라
17일 죽음을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18일 우리는 동이 트자마자 떠났다
19일 우리 집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20일 수면 장애에 대해 써라

21일 의심에 대해 써라
22일 교묘한 속임수에 대해 써라
23일 유리 뒤에 갇혀 있는 것
24일 창문 없는 방
25일 누군가와 함께 여행중이다
26일 밤새 비가 왔다
27일 성지 순례에 대해 써라
28일 그(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29일 당신은 물속에 있다
30일 누군가 당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31일 낮 공연에서


11월

1일 '여기는 나의 집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비숍의 작품에서)
2일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우편물
3일 '밤마다 우리는 자신을 구원한다' (하이메 사비네스의 작품에서)
4일 눈 깜빡할 순간에 일어난 일
5일 쓸쓸한 밤거리를 걸으며
6일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7일 비애로 가득한 인생
8일 '나는 기억에 빚을 졌다' (버나드 쿠퍼의 작품에서)
9일 기다림에 대해 써라
10일 우리는 그것을 포장했다

11일 풀장의 파란색 물
12일 머나먼 과거의 유산
13일 각성에 대해 써라
14일 꽁꽁 얼어붙었던 사흘 간
15일 '무언의 굶주림'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작품에서)
16일 여행의 끝에서
17일 수영 배우기에 대해 써라
18일 평범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라
19일 당신은 호텔 객실에 있다
20일 '어느 지점에서 죽음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비아 로우의 작품에서)

21일 그것은 손으로 만들었다
22일 멈춰 서서 창문 안을 들여다보기
23일 '우리가 __를 향해 떠났을 때'
24일 목욕용 가운에 대해 써라
25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6일 뒷골목에 대해 써라
27일 그것을 서랍 속에서 발견했다
28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29일 무더운 오후에 해야 할 일
30일 '언제나 하나 이상의 침묵이 있다.' (일라 카민스키의 작품에서)


12월

1일 은반지에 대해 써라
2일 이것은 어머니가 알려주신 조리법이다
3일 해안에 밀려온 것
4일 몽상의 지도
5일 '새들이 잠에서 깨 노래를 부르고 있다' (로이 쉴레의 작품에서)
6일 당신이 가진 최초의 기억
7일 마을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고속도로
8일 이것은 그녀(그)의 환상이다
9일 마지막 손님이 떠나고 난 뒤
10일 '당신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몇 가지' (마이클 온다치의 작품에서)

11일 '길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12일 '사랑에 빠지지 말라'
13일 당신이 태어나던 시각에
14일 구석에 있는 테이블
15일 달무리에 대해 써라
16일 꼭 기억할 일을 써라
17일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18일 그(그녀)는 평소대로 주문했다
19일 편도 차표
20일 '내 생일에...'

21일 지름길에 대해 써라
22일 소중한 것을 잃은 적이 있는가? 그 중 한 가지를 써라
23일 천 개의 비밀이 내는 소리
24일 날이 어두워진 정원에서
25일 구석에 숨어 있는 것
26일 '우는 방법에 대한 설명'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작품에서)
27일 비가 멈춘 뒤
28일 로비에서 기다리며
29일 내가 태어난 마을
30일 알몸이 된다는 느낌

31일 마지막 하나의 생각


Posted by 라키난
,

『혐오발언』 저자 모로오카 야스코 초청 간담회
2015년 4월 12일 일요일 오후 2시
한국 이주여성인권센터

주최: 이주여성인권포럼, 공익인권법센터 공감
사회: 김영옥 (이주여성인권포럼 대표)
통역: 조승미 (번역자)


『혐오발언』 (모로오카 야스코, 오월의봄) 알라딘 출간예정작 안내 페이지. (현재는 6월 출간 예정이라고)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5_new_human&idx=4#

* 혐오발언 관련 기사
"혐오발언, 포용할 것인가 응징할 것인가" (제레미 월드론의 『혐오발언의 해악』 서평)  http://slownews.kr/20192
"울타리의 역설: 혐오발언, 어디까지 처벌할 것인가" http://slownews.kr/21110




저자 소개

모로오카 야스코(師岡康子)

 변호사 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객원연구원. ‘인종차별철폐 NGO네트워크’ 공동간사.
  2003-2007년 일본변호사연합회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도쿄변호사회 외국인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일본 내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와 관련된 소송을 주로 담당해왔다. 2003년 재일조선인들이 도쿄의 쓰레기매립지 에다가와(技川)에 세운 초등학교를 상대로 도쿄도가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했을 때(‘에다가와 조선학교 소송’)에서 폐교위기에 처했던 학교 측 변호를 맡아 승소로 이끈 바 있다. 2014년부터는 고교 학비 무상화에서 배제된 조선학교의 무상화를 요구하는 소송에 참여하고 있다.
한편 2010년부터는 일본 내에서 발생한 혐한시위, 혐오발언 문제와 관련하여 활발히 대응해왔다. 2013년 12월 일본의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출간한 “혐오발언(Hate Speech)이란 무엇인가”(한국 가제: 혐오발언)는 일본사회에서 인종적, 민족적 소수자라 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혐오발언의 현황을 짚으면서, 차별을 선동하는 혐오발언의 양상, 혐오발언이 역사적·사회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해악, 법 규제 등을 살피면서 혐오발언을 검증하고 있다. 나아가 혐오발언으로 인한 소수자 피해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차별금지 교육, 정책 구축 등을 제시하여 일본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혐오발언은 단지 불쾌한 표현이 아니라, 국적·민족·성 등의 속성을 이유로 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부정하는 언어폭력이며, 차별과 폭력을 사회적으로 만연하게 만드는 차별선동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제노사이드(집단학살)와 전쟁을 초래했다” -본문 중

 “무엇보다도 생각해야 할 점은 소수자가 (혐오발언 등의) 차별로 인해 자살을 선택할 정도의 고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저자후기 중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본어로 말씀드리는 데 양해를 구합니다. 제가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학생 때부터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혐오발언의 핵심이 소수자 차별이라는 생각에서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혐오발언은 차별의 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최근에 나타나는 혐오발언 하나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재일조선인 문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생겨났는데, 이에 대해서 2차대전 전후에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일본 정권이 생겼기 때문에, 외국인으로 재일조선인 차별이 생겼고 공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차별을 해왔습니다. 저는 재일조선인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들 전부가 다 일본 내에서 소수자로서 “일본에서 나가라”, “죽어라”, 이런 말을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취직을 할 때, 학업을 할 때, 집을 빌릴 때에 차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최근의 상황과 다른데요. 90년대까지 일어났던 차별에는 ‘이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 분위기가 바뀌면서 나온 것이 최근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혐오발언입니다. 2000년대 이후로 넘어오며, 특히 최근 수 년 간 혐한시위를 포함하여 공공연히 차별을 하는 발언이 늘어났고, 출판물도 늘어났습니다. 가장 큰 책임은 물론 일본 정부에 있지만, 한편으로 일본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힘이 약하고 이를 막지 못해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에 있습니다.

  책을 쓴 목적에 대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혐오발언은 바로 국제인권법기준에 비추어볼 때 위법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혐오발언에 대해 차별 반대 운동을 할 때 무기가 되었으면 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국도 유엔의 인종차별철폐조약에 가입해 있는데요. 일본도 가입해 있습니다. 조약에는 분명히 혐오발언, 차별이 안 된다고 되어 있고, 이건 정부로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기준에 맞춰서 우리가 투쟁할 때 무기로 활용할 수 있도록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도 평등을 추구하며 운동하는 여러분들께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일본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책이 나온 후의 큰 변화는, 일본 내부에서 인종차별철폐조약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신문이나 활동가들을 통해 조약의 존재와 그 개념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포함해서 총 100개의 일본 지자체 의회에서 각기 혐오발언에 대한 의견서를 냈습니다. 혐오발언은 안 된다, 인종차별철폐조약에 비추어 안 된다는 의견서입니다. 또 국회의원들이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이라는 법안을 냈습니다. 아직 시안이긴 하지만 법안으로 나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일본 사회에는 아직도 장애가 많고, 아베 정권은 재특회라는 우익 시민단체나 인터넷 우익 단체들의 생각과 밀접한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등 이웃 나라를 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차별은 안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여당에서는 혐오발언 문제를 새로운 법이 아닌 현행법으로 어떻게든 넘어가고, 법무성에 맡겨서 알아서 진행하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 일본 정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일본 법무성은 혐오발언 문제를 담당하기에는 부적당한 행정부처라는 생각이 드는데, 재일조선인을 포함해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을 법무성에서 가장 많이 해왔고, 산하에 그 차별을 한 입국관리국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일본 사회에는 심각한 인종차별이 없다’는 게 일본 법무성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희 운동 쪽에서는 대응의 방향을, 1) 혐오발언이나 차별을 선동하는 활동과 관련한 처리를 법무성에 맡기지 않는다, 2)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든다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현황에 대해 보충을 드리면, 재특회는 비판 여론이 커졌기 때문에 힘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국가가 혐오발언을 선동하는 모습은 여전합니다. 민간 출판 등에서는 이런 상황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예로 하나 말씀을 드리자면, 일본 역사 교과서를 개악해온 문제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1923년에 있었던 관동대학살, 당시 재일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사건의 희생자는 수천 명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악해서 230명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상징적이고 중요한 예인데요. 왜냐하면 혐오발언의 궁극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혐오발언은 소수자에 대한 폭력, 전쟁이나 학살 등으로 발전해가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재특회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위헌의 소지가 있는 단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관동대학살 자체는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모순이 있습니다.

  혐오발언의 핵심은 차별이기 때문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배외주의라든지 전쟁 등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아베 정권은 식민지 정책을 미화하며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인데요. 우리는 차별에 반대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흐름으로서 아베 정권과 싸우려고 이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운동도 굉장히 힘이 약한 상황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꼭 이 문제를 풀어갔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운동을 해오며 썼던 이 책이 한국에서의 운동에 도움이 됐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 국내에 있는 차별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지만, 여러분에게 듣고자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면, 그리고 여러분이 저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면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질문

 - 한국에서는 ‘조선족’의 범죄를 부각하는 방향으로 보도를 하고 있고, 현실에서도 혐오발언이나 반대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데요. 일본에서 외국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어떤지, 그리고 이를 감시하는 등의 활동도 같이 하고 계신지.

 :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에 대해서는. 일본의 경우 언론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일본 정부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2000년대 전반에 일본 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외국인 범죄를 없애자고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가 20만 명 정도 있었는데요. 범죄의 온상이 바로 외국인 노동자라며 일본 경찰이 나서서 캠페인을 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찰 백서라는 걸 연간 내는데, 거기에 외국인 범죄가 이만큼이나 된다는 통계가 실렸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이렇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언론에서도 이를 받아쓰고, 크게 다루는 식으로 흘러갔습니다. 당시 20만 명 정도가 있다고 했는데, 캠페인을 벌이며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심하게 했습니다. 실제로 그 수가 7만 명 정도로 크게 줄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언론에서는 범죄의 온상이라고, 그 캠페인과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는데요. 외국인 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다른 모든 점보다 외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식으로 보도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아마 한국에서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는데요. 가와사키라는 곳에서 18살 나이의 아이들 3명이 13살 되는 나이의 중학생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연루됐던 아이들은 모두 일본 국적을 가졌는데, 가해자 하나의 어머니가 필리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도는 아이의 어머니의 국적이 필리핀이고 아버지의 뿌리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쪽으로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잔학한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아닌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 아까 재특회 말씀을 하셨는데, 한국에서 차별 발언이 가장 심한 곳은 일베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종차별만이 아니라 여성혐오가 심하게 나타나는데요. 일본에서는 이런 곳이 있는지.

 : 재특회만 말씀드리자면, 거기서는 여성 일반이 아니라 재일조선인 여성, 외국인 여성이라는 점을 공격합니다.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냐면, 재일조선인 여성이 트위터 등 인터넷을 쓴다는 걸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공격을 합니다. 지금 재일 한국인 한 분이 재특회를 상대로 재판을 진행 중인데요. 이 분은 민족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같이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저도 아까 잠깐 한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베가 왜 그렇게 여성 전체에 대한 집단적인 공격을 하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재특회 등 인종차별주의자 집단에는 여성도 반 정도 있습니다. 같은 여성으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인데요. 작년의 경우에도 여성들이 나서서 인종차별주의자 집단에 끼어서, 유엔의 자유권규약 심사에 가서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주장을 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일베는 남성의 비율이 꽤 높다고 들었습니다.


 - 한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여성 혐오가 심한 것 같습니다. 군 가산점제 폐지 등 남성들에게 자기가 차별받았다고 느끼게 하는 계기들이 있었고, 열패감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게 국제결혼을 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발언과 연결되어 있고요.
  : 한국에서 여성과 남성의 진학률에 차이가 있습니까?
  - 여성이 10% 정도 더 높아요.
  : 그게 바뀌어온 현상인 거고요.
  - 네.


 - 저는 혐오발언 문제가 최근에 굉장히 심해진 것 같거든요.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동아시아만의 문제도 아닌데,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고 테러리즘이 심해지고, 젊은 세대를 이런 식으로 선동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럴 때 실제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자가 아니라는 점이 포인트인 것 같아요. 본인들도 사회에 불만이 많은데 실제 피해자라고 이야기되면서 보호받고 지원을 받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고 자기는 그런 자원을 제공받지 못한다는 생각이요. 젊은 세대 중 자신이 성공의 경로를 밟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혐오발언에 많이 노출되고요. 일본도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자료에도 “재일조선인이 특권을 다 가져간다.”는 말들이 있는데요. 다들 같은 문제를 품고 있는데도 ‘우리가 같이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편을 가르는 쪽으로 갑니다. 일본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지 않을까.

  : 재특회의 경우만 봐도, 중심 멤버는 비정규직이나 실업자 등 생각해보면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분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재특회는 재일조선인이 특권을 가졌다는 예로 생활보호법을 들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이 생활지원, 생계지원을 엄청나게 받고 있다, 그런 헛소문을 지어내서 선동을 하는데요. 생활보호법이 이렇게 선동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아마 속으로는 정말 부럽다고 생각하는 게 있기 때문이겠죠.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 안의 멤버를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큰 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혐오발언은 차별의 일부이고, 말씀하신 대로 저도 ‘분단하여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황 자체로 보면 혐오발언을 하는 가해자가 다 약자는 아니라는 점이 많이 지적이 되어왔습니다. 저도 일본에서 강연을 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듣는 사람들 중 자기는 대기업 사원인데 재특회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저번에 산케이 신문 기자가 체포되는 일이 있었잖아요. 박근혜 기사 때문에요. 그걸 근거로 한국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산케이 신문 기자를 체포한 건 한국인이 잘못한 거다, 재일조선인은 잘못됐다는 식으로 말하기에, 그건 한국 정부의 잘못인데 왜 재일조선인이 잘못이라고 하는지 물어봤습니다. 이 문제는 국가주의와 연결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혐오발언에 대한 대책으로 비정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경제적 대책이 우선이라는 입장이 나오는데요.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경제적 격차만이 혐오발언을 만들어내진 않습니다. 더 살펴보면 사상적인 원인, 배외주의나 국가주의라는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한국에서는 혐오세력이 전에는 온라인에서만 활동했다면 지금에는 오프라인에서 조직화된 활동을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성소수자 관련해 가장 심각한 집단 혐오가 보이는데요. 이걸 기독교 세력들이 지원하면서 매우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활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권헌장 제정을 무산시키고, 지금은 이주민에게 가는 예산을 막자고 기세등등하는데, 이게 소외집단이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단이 아니라 중산층 기독교도 등. 겉으로 봐도 멀쩡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 한국에서 혐오발언은 다차원적으로 일어나고, 일관성이 있지 않아요. 여성(젠더), 성소수자,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조롱과 혐오 등. 선생님은 아까 일본에서 “인종”차별법을 입법하는 게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차별과 혐오가 인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데. 혐한시위 등 인종차별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요. 선생님께서 입법 활동을 하는 이 법은 인종차별에만 중점을 두는 것인지요. 그리고 법을 만들면 규제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저는 법을 잘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한국에서는 성폭력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가해자들에게 교육을 하잖아요. 독일에서도 네오나치 등에게 교육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고요. 선생님께서 입법 활동하시는 그 법의 처벌이나 교육은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효과를 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 성소수자 혐오는 일본에도 있습니다. 동성애자 집회에 장소를 빌려주지 않는다거나, 집을 빌려줄 때 동성애자면 들이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번에 도쿄 도에서는 동성 커플을 인정한다는 조례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이시하라 도지사라는 사람이 이런 발언을 많이 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수자 혐오가 인종차별주의자에게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는 제가 아는 바가 없고요.
  두 번째 질문하신 것과 연결되는 점인데요. 혐오 발언이 규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입법안을 마련할 때,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나 성소수자 등 다른 차별을 포함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저도 여성 차별 관련해서 운동을 따로 하고 있는데요. 여성 단체에서는 여성차별에 대한 금지법을 따로 만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하는데, 일본의 운동이 약한 탓도 있지만, 여러 문제를 같이 다루기에는 실정상 문제가 있는 게 현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태까지의 경과를 살펴보면, 개별 운동들이 힘을 모으지 못했고 그때그때 대응하는 식으로 입법안을 마련해왔기 때문에 저력을 모으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장애인 차별해소법이 따로 생겼고요. 그 전에는 남녀차별에 관해 고용기회균등법이라는 법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법이 따로따로 생기는 식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국가 자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지자체에서 조례를 먼저 만들고 하나씩 입법을 하는 게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입법된 게 없습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 입법을 하는 게 힘들기 때문에 일단 인종에 대한 입법을 하자고 의견이 모아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인종차별에 관해서는 일본이 인종차별철폐조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이를 국내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익 정권에도 이 입법안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진행해온 부분도 있습니다. 한편 작년에 따로 생긴 장애인차별해소법은 일본의 법무성이 아니라 내각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맞춰 인종차별도 법무성이 아니라 내각에서 담당하라는 쪽으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한센병 환자, 여성 등에 대한 차별을 모두 포함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법률만으로 차별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고요. 그래서 현재 입법안은 교육 쪽을 매우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규제법을 마련한다고 해도 이를 운용하는 공무원들이 해당 혐오발언이 규제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특히 공무원에 대한 교육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선생님과 약간 다른데, 법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성희롱방지법을 예로 들었는데요. 이게 나오면서 공적인 자리의 성희롱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재일조선인들 죽어라’라는 말이 나올 때 이를 규제할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싫어서 이를 규제할 수 있는 입법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예를 들고 싶은데요. 물론 규제가 있다고 혐오발언 등 차별 표현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의 표현을 억제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 인종주의적인 차별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한국에서는 한국계에 대한 반응이 이중적이라, 미국에 사는 한국계와 중국에 사는 조선인에 대한 반응이 매우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남미로 간 일본계 후손에 대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들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이나 매체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일본에서도 그 문제가 심각합니다. 같은 일본인이라는 뿌리를 갖고 있는데 이민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 브라질인이라고 국적이 되어있는 일본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1990년대에 이분들에게 노동시장을 개방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이니까 다루기 쉽겠다는 생각에 노동시장을 개방하여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민족이니까 환영하자는 정책은 처음부터 아니었고요. 일본인이니까 쉽게 써보자는 생각으로 나온 정책입니다. 많은 분들이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하청업체를 통해 고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계라고 해서 받아들였는데 이 분들의 모국어는 포르투갈어거든요. 생김새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어는 한 마디도 못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일 때 이분들과 아이들에게 아무런 교육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외국인 분들의 교육 문제, 어린이 교육 문제에도 관심이 있는데요. 일본에서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건, 외국인 노동자의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권리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약 부모가 희망한다면 일본인 학교에 무료로 들어갈 수는 있는데요. 이게 권리가 아니라 혜택을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어 교육이나 모국어 교육을 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나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가지 않아도 그냥 놔둡니다. 일본에서 전반적인 고교 진학률은 98%가 되는데요. 일본계 브라질인의 경우에는 2-3%밖에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아이들이 중학교를 나오면 전부 공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까지 이렇게 되고 있기 때문에, 차별이 확대되고 또 재생산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계 브라질인에 대한 혐오발언도 있고요. 이에 기인한 증오범죄들도 있습니다.


  - 제가 아는 일본의 운동은 각 운동의 연대가 한국보다 많이 하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조례가 도쿄 말고 시부야에서도 이루어져 2군데에서 제정이 진행되는 활기찬 상황인데, 통일교에서 일부 나와서 그에 문제 제기를 하거나 캠페인을 하는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질문입니다. 1)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을 올해 초 정기의회에 낸다고 아리타 의원이 말했었는데, 나온 것인지. 내용이 공개된 상태가 아닌데 혹시 나왔다면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2)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은 나중에야 정해진 이름이라고 아는데, 왜 금지법이 아니라 ‘기본법’인지. 3) 일본에서는 조약 4조 B를 유보하고 있는데 C는 유보를 안 하고 있잖아요.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인죄를 들어 처벌을 하는데, 일본에서도 관동대지진을 부인하는 등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 없는지.

 : 일본에서 대응활동 하시는 분들도 잘 모르는데 말씀하셔서 놀랐습니다. 말씀하셨던 인종차별철폐금지법을 발의한 아리타 의원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처음 만나 5월에 국회에서 관련한 모임을 가졌는데요. 차별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모임 등, 저도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리타 국회의원은 혐오발언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도 하고 있는데요. 저널리스트 출신이라 원래는 혐오발언을 ‘규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5월에는 혐오발언 규제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인종차별철폐조약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상태였는데요. 그 국회의원만이 아니라도 조약이 있다는 걸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사회에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 전체에서 잘 모르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이 국회의원과 제가 같이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이건 차별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의 규제가 아니라 차별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법에는 저 같은 사람까지 포함하여 연락해 시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시안 그대로 통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의 참의원, 법제부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의 관료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제부 관료가 하는 말이, 인종차별철폐라는 말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1995년도에 뒤늦게 조약에 가입을 했는데, 이와 관련해 법을 하나도 만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일본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종차별철폐조약에 관한 사항을 이번 시안에 넣어버리면 95년도에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넣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요. 그런 경과를 거쳐 작년 11월에 법안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습니다. 매우 불충분한 내용이긴 한데, 그래도 담당이 법무성이 아니라 내각이고, 차별철폐조약 등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는데, 법안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건 저희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불충분해서 저희가 만족스럽지 못해 바꾸려 하는 중이라, 아직 법안 자체가 논의 중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작년 11월에 법안을 마련했을 때 임시 국회가 열렸는데, 당시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 꼭 통과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법안을 내려고 한 시점에 국회가 해산해버려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꼭 통과시키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당시 낸다고 통과됐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법안을 같이 의논해왔던 국회의원들은 전부 야당이고, 여당이 들어가 있긴 한데 여당인 자민당의 실세 의원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용 자체는 반대하기 어렵게 만들어놨습니다. 명분 등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냈으면 반대하기 힘들었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해산이 되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자민당이 반대하기 어렵겠다는 이유는, 내용도 그렇지만 혐오발언은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국회가 어수선할 때 빨리 통과시키려 했는데 기회를 못 잡았습니다. 이번 정기 국회에 통과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리타 의원은 트위터를 잘 사용하는데, 당시 일반인이 아니라 재특회를 타겟으로 트위터를 쓰고 있었기에, 그래서 어렵겠다고 써놓으신 겁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전략을 취하는 이유는 법안이 통과되려면 어떻게든 일본의 여당 의원들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올 5월에 야당인 민주당이 발의하는 것으로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이걸 국회에 올리면 심의를 하게 되는데, 아직 자민당의 영향력 있는 의원들이 확보가 안 되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전략을 짜기를, 한일의원 연맹이라고 한-일 간 우호를 증진하자는 활동을 하는 분들이 있어서, 이 연맹에 소속된 사람들을 움직여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찬성했던 여당의 하나인 공명당(지금은 연립여당 상태죠)에서 법무성이 안 된다고 하자 입장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당을 압박하기 위해 공명당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고, 법무성은 안 된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법무성이 해온 일들을 퍼뜨리는 등의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으로 포괄적으로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기본법으로 가는 것은 일본의 특수한 사정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어쨌든 국가인권위가 있고 차별에 대한 통계 등을 조사하는 것으로 아는데, 일본에서는 이런 통계조차 내지 않는 상황입니다. 원래 장애인차별해소법이 작년에 입법이 됐다고 말씀드렸는데, 경과를 살펴보면 기본법을 먼저 마련한 다음에 해소법이 생긴 것이고, 이 과정을 참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전술적인 면이 있고요. 조사도 안 되고 담당 행정부도 없는 등 토대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짜게 된 것이죠. 물론 차별금지법도 그렇고 관련 기관도 그렇고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베 정권은 극우 정권이기 때문에, 인권기관을 만들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정권이라서 민주나 인권 같은 단어를 싫어하거든요. 예로 말씀드리면 지방 공공단체에 아베 총리가 와서 연설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연설문을 미리 써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방 공무원이 미리 보고 연설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베 총리가 그 단어를 싫어하니 빼라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종차별철폐조약 4조 C항을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요. 이시하라 도쿄 도지사가 4조 C항을 위반하는 발언을 많이 했는데요. 재일조선인은 삼국인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운동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여론을 크게 움직이지 못했는데요. 그렇게 4조 C항을 활용하여 공인들의 발언을 비판하는 방법은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번 재특회 사건을 기해 처음으로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거든요. 이건 그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홀로코스트 부인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특히 일본 같은 경우는 위안부가 없었다는 등의 발언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럽의 홀로코스트 부인죄를 참고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법률로 규제하자는 운동을 할 수는 있어도, 일본 정부에서 이미 위안부가 없었다, 강제로 데려간 적이 없다고 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이런 역사적으로 있었다 없었다 하는 발언을 규제하는 방향은 표현의 자유와 계속 연결되어 이야기되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다시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 독일의 집단 모욕죄나 민중 선동죄. 한국에는 모욕죄도 있고 명예훼손죄도 있고, 그게 남용되는 측면은 있지만 그래도 인격권을 부각하는 면이 있는데요. 어느 쪽이든 차별보다는 인격권을 강조하는 쪽입니다. 일본에서는 이게 어떤지. 그리고 공인들, 한국에서는 변호사 집단이 성소수자 관련해서 목소리를 내는 등 활동을 하는데. 변호사는 변호사 윤리 강령을 두는 등 전문가 집단의 경우 윤리의 차원으로 규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서요. 일본에서는 그런 체제가 없는지.

 : 독일의 경우는 제가 책에서도 쓰긴 했는데요. 모욕죄는 차별죄가 아니라 인격권에 초점을 두고요. 민중선동죄는 차별을 규제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중선동죄에도 문제가 있는데요. 이 항목은 원래 일부 집단에 대한 비방, 선동이 죄라는 식으로 쓰여 있는데, 그 후로 개정이 되면서 일부 집단이 아니라 민족 등 사회적 속성에 기초한 집단이라고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데서 저도 말씀하신 대로 남용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용의 여지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집단모욕죄로 넘어가면, 지금의 일본에는 집단모욕죄가 없는데 형법에 이를 만들어 넣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형법을 그렇게 먼저 고치는 건 약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집단모욕죄에서 말하는 것은 차별의 문제이기 때문에, 금지법을 만들거나 교육을 하거나 정책을 마련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지의 예를 살펴보며 제가 알게 된 것은, 혐오발언을 규제하는 것을 남용하는 사례가 분명 있습니다. 남용이 없는 나라는 차별금지법에서 어떤 것이 차별인지를 명시하는 곳입니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곳인데요. 국가가 먼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행해왔다는 것을 반성하고 그 후에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마련한 곳에서는 남용이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공인이나 전문가 집단에 관한 윤리 강령을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공인에 대한 윤리 규정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비슷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공인들이 혐오발언을 할 경우에 공인에 대한 윤리 규정으로 대처를 하자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방향은, 만약 국회의원이 혐오발언을 한다면 이를 법률이 아니라 규정을 통해 의원직을 내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의원들은 자신들에 대한 관용이 크니까 아마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유엔에서도 이미 이런 쪽으로 강령을 마련하라고 권고가 나온 바 있습니다.


  - 혐오발언이 차별이라는 생각 자체가 일반화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책 출간이 매우 기대되는데요. 하지만 혐오발언이 어떤 식으로 피해를 입히는지, 그게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지 등은 규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피해 조사도 안 되어 있고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입법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외에 어떤 활동이 가능할까요?

 : 혐오발언이 차별이라고, 그리고 이를 사회적으로 문제시하기 위해서는 피해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원래 입법 활동과 같이 되어야 하는 부분인데요. 아까 국회의원들이 규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드렸는데, 이들이 바뀌는 데에는 소수자의 실태를 알게 된 점이 주요했던 것 같습니다. 혐오발언의 문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많은 언론의 협력을 받아 소수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인터뷰를 많이 했었고, 그게 많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몇 개 단체에서 피해자 실태에 대해서 청취조사를 했습니다. 이런 피해자 실태 청취조사를 하면서 혐오발언이 어떻게 실제로 피해를 주고 있는지 사회에 알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국회의원들의 생각이 변했습니다. 일본 변호사회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혐오발언 관련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있으므로 규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있었는데, 소수자의 실정을 알게 되면서 협회 전체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규제가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혐오발언이 표현되는 방식보다는, 혐오발언이 실생활에서의 차별과 연관이 되면서 차별을 공고하게 만들어내고. 이로 인해 소수자들이 사회로 나올 수 없도록 배제하고. 자살에 이를 정도로 내몰고.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피해 실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재특회가 조선 학교 앞에서 반대 시위를 하고 차별 발언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있었는데요. 이걸 재판을 해서 이긴 적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실정이 조금 더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일본 사회에 알려진 게, 조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아서 아직까지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조선학교에서 혐오발언과 시위가 일어났을 때가 점심시간이었는데 아직도 도시락만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고 피해를 호소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학교 다니는 재일조선인 어린이들 중 일본인과 대화해야 할 때 말이 안 나온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피해 실정을 전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해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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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를 살아낸다는 것" 알라딘 인문학 스터디 시즌2
- 엄기호, 노명우, 류동민 (사회: 박태근)
2015. 2. 12. 목요일 저녁 7시반, 정동 프란체스코회관 410호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7152
류동민: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218125



* 개인 기록용.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 아니라 표현 등은 정확하지 않으며 해석이 들어가 있음. 문장은 임의로 '-다'로 마무리.
* 강조 표시는 개인적으로.




1. 자기 책에 대한 한마디

노명우: ("반지하 자취방 냄새가 나는 책"이라는 평에 대해)
- 학자가 되려고 한 공부였다. 그럼 사회학자란 뭘까 고민했다. 세속의 언어와 학계의 용어를 연결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왜 전문용어는 서양 학자가 쓴 개념의 번역인지 의문을 품었다. 그건 자극제는 되겠지만 전부는 아니다. 학자가 만들어내는 전문용어에서도 한글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 이전 책에 비해 무엇을 위해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가 많이 바뀌었다. 내가 발 딛은 한국 사회에 대해 썼다. 사회학자가 되려면 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제일 쉬운 방법인,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벗어나서 내 생각을 해보자는 의도에서 썼다.

류동민: ("서울에 산다는 것"에 대해)
- 나는 이론경제학자이고, 실제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수치 쓰고 그래프 그린다. 그보다 사람의 언어로 말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변화한 서울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서울에 돌아와보니 많이 변했더라.
- 언어는 정확하게 표현을 하지 못한다. 이론경제학은 아주 정확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정확한가. 정확한 표현을 하려고 끝까지 추적하는 사람이 있다. 프루스트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김훈의, "칼이 울었다"는 문장이 더 정확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글이 불투명해졌고, 그래서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반응도 받았다. 한번 떠오르는 대로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사회과학은 정확한 표현을 하려고 추적하는 쪽이지만, 과연 그게 다인가 싶다.

엄기호: ("이번 책은 세상의 끝을 다 끌어안은 듯...")
- 성장에 관심이 있다. 교육은 결과를 나의 대상에게 다 맡겨놓는 것이다. 그건 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끔 기적이 일어난다. 가르침, 배움, 성장이 관심사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배움이 일어난다. 혼자 배우지는 않는다. 왜 이렇게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가. 배움, 갱신이 일어나야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학자인 듀이의 "연속성" 개념처럼. 그런데 다 파편화되고 뚝뚝 떨어져서 "단속"된다. 개념 만드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박사논문 쓰느라 개념을 새로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 구호에,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게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사람은 선배들의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다. 그건 단절이 아니라 반복이다. 그렇지 않은 게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극복, 돌파로서의 단속이 왜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 강연 같은 거 할 때마다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 언제는 10분도 안 되어서 일어나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대안을 요구받을 때마다 사람들이 정답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서나 적용되는 모델을 보여달라, 한번에 모든 게 해결 가능한 모델을 바란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한다.



2. 한국 사회를 ㅇㅇ사회라고 이름 붙이려는 마음에 대해. 그리고 각 전문 분야에서는 어떻게 연구를 하는지.

류동민:
- ㅇㅇ사회란 말은 출판사에서 상업성을 고려해서 붙이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단어로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라벨링을 하면 고려하지 못하는 면들이 생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보면, 키워드 하나로는 정리되지 않는다. '피로사회'라고 해도 피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다. 두 층 사이에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공간, 왜 그런지 이야기를 해볼 연결지대가 필요하다.
- 경제학에서 사회 분석을 하면 당분간 '불평등'이 키워드 아닐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덕분에.

엄기호:
- '사회'를 책 제목에 넣는 걸로 출판사와 싸웠다. 사회가 없다는 내용인데 어떻게 제목에 사회라는 말을 넣나. 그런데 친구가 '단속'이라는 말에 이미 사회가 없다는 뜻이 있으니 써도 괜찮겠다고 하길래, 묘하게 설득돼서 넣었다. 한국의, 개념 한두 개로 스냅샷 찍듯 전체를 포착하려 하는 경향이 보인다. 사회에 대해서는, 시간성 등의 차원으로도 볼 수 있는데, 공간성을 주로 묻는다. 공간성, 특히 "전국적"(부정적인 어감으로 쓴다), 국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지역, 동네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 학회에 소속되질 않아서 인류학, 문화학이 어떻게 연구하는지는 모른다. '학자들은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 학자들의 말은 쉬운 것이다. 공부하면 알 수 있다. 칸트도, 책 보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공부하면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말의 영역에 진입한 것이고, 로고스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뭐라고 부를까, 민중의 말이 어렵다. 나는 질적 연구를 하니까 인터뷰를 한다. 가장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교사들인데, 교사들도 녹취 풀어보면 횡설수설한다. 특히 자기 고통에 대한 부분은 말이 말로 되지 않는다. 말의 세계, 로고스에 진입하지 않는다. 그건 소리다. 고통은 소리로 표현된다. 그래서 알기 어렵다. 계속 반복해서 들어보고, 같이 지내보고, 그래야지 알 수 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목소리를 말의 세계에 진입시키는 게 저희랄까, 제가 하는 일이다.

노명우:
- 사회과학의 한계점이 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비판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을 날카롭게 보려는 학생들이 있다. 다만, 그게 냉소주의와 결합해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학대와 자기연민까지 연결된다. 그걸 들으면 어느새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게 된다. 냉소주의에서 좀 벗어나라는 마음에 하는 말인데, '세상을 더 따뜻하게 보면 안 되겠니...?'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뭐야. 예전에 컴퓨터에 편집자도 모르는 비밀 폴더가 있었다. 나도 ㅇㅇ사회라는 글을 쓰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ㅇㅇ사회라는 말과 멀어졌다. 사회의 문제에 집중하고 이를 진단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수십 개가 나온다. 삶에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진단에서 그치면 냉소가 된다. 진단을 할수록, 진단이 많을수록 무기력해진다. 비판을 지향한다. 비판이란, 진단에서 출발한다 해도, 문제 제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본다. 제가 해온 것도 주로 진단의 영역이었지만, 진단보다 비판이 결코 쉽지는 않다.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냉소적이지 않은 긍정과, 이를 낭만에 그치게 하지 않는 힘이 필요하다. ㅇㅇ사회라는 진단에서 벗어나서 비판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글 쓰던 폴더도 지워버렸다. 편집자님 이거 끝나고 그거 무슨 내용이었냐고 묻지 말아주세요.



3. 청년들에 대해.

엄기호:
- 원래 공부 중이던 주제다. 청년들의 과격화, 급진화(Radicalization of Youth)에 대해서다. 이 주제 연구는 예전부터 있었다. 얼마 전 샤를리 앱도, 이슬람 테러 등. 이게 왜 그렇게 충격이었냐면, 자유의 상징이었던 언론사가 공격받았다는 것도 있지만, 그 테러를 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국에서 건너온 이민자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서구적,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다. 범인 이웃들 인터뷰를 보면 '장애인(본인)에게 특히 친절한', '이웃에게 예의바른'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왜일까. 자국민 교육의 실패라고 파악한다.
한국은 어떤가. 이들이 서구에서는 인구학적으로 구분된다. 한국에서는 인구학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구분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는 청년들이 무기력으로 과격화된다. 그런 짤 있지 않나. "더욱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더욱 적극적으로, 과격하게 무기력하려 하기에 무언가를 한다. 여러분도 그래서 이런 데 오는 거잖아요.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으니까 무기력해진다. 세상을 고쳐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붕괴해야 한다고, 리셋해야 한다고 바란다. 설문에서 43%가 한국사회에 "붕괴"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청년들이 무기력 속에서 어떻게 과격화되고 있는가, 이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 혁명이 오는 거냐, 아니다. 386세대 등은 전후사회에 재건과 변혁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 날려버리고 싶다는 쪽인 거다. 이건 극우적일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할수록 무기력해지는 현상과 맞물린다. 특히 노동할수록 가난해지는 현상과.

노명우:
- 저는 84년 대학에 입학하고, 88년에 졸업하고, 바로 90년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80년대를 온전히 대학가에서 보냈다. 386세대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알고 보면 왜곡이 많다. 당시에는 1년 내내 술을 마시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울었다. 80년대에는 80년대의 방식으로 무기력했다. 시간이 지나서, 87년 6월항쟁 등 사건으로 정리된 걸 보니 기억이 달라진다. 나는 그때 롯데백화점 매대에서 우산을 샀다. 혹시 전경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 우산이나 사는, 우산이 도움이 되리라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기억은 다 사라지고, 지금은 나에게도 6월 10일이 영웅적인 무엇처럼 기억된다.
- 세대마다 운명이 다르다. 운명이다. 당시에 20대였던 때문에 겪은 경험들이 지금 내 운명을 만들었다. 다른 시기에 다른 곳을 겪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외국으로 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이 자리에 붙박인 이유는 그때 20대라 겪은 경험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대마다 특징이 다르다. 그 특징을 알고 언급하는 건 중요하고, 각자가 어떤 운명에 처해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것뿐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넘어가면 할 말이 사라진다. 어떤 세대도 틀리지 않다.
- 'ㅇㅇ사회'라는 말처럼 '세대'라는 말도 안 쓰려고 하는데. 지금의 청춘들만이 아니라 각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한다.

류동민
- 이사하느라 대학 1학년 때 일기를 찾았다. 노명우 선생님과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 있었는데, 짝사랑에 실패했을 때 일기다. 보면 술 얘기와 그 여자애 얘기 뿐이다. 80년대 군부독재 이런 얘기 없다.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 사람은 줄을 세울 수 없지만, 경제학이니까, 돈이라는 건 줄을 세울 수 있다. IQ는 불가능하지만 돈은 사람을 가르고 줄세울 수 있다.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할 수 있음 없음이 정해진다. 90년대까지는 변화의 여지가 많았다. 생활 수준이나 사회 분위기는 지금보다 나쁘더라도, 하려면 할 수 있다는 여지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면에서 획일화, 고정되었다. 태어남 - 학교 - 취업 - 주거 지역 등이 이른 시점부터 갈라지고, 다른 쪽으로 갈아타기가 힘들다. 2 트랙 사회라고 하겠다. 나이가 드니까 자식 이야기도 하게 되는데, 자기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절망적이지만, 자기 때문에 자식들도 위치가 결정된다는 게 절망적이다.
- 사실 전공이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희망 주기 힘들다. 냉소는 한계에서 일탈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지속되다 보면 힘이 없다. 그건 2 트랙 사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 내에 압축 성장한, 긍정적인 힘이 있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는 거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쪽과 냉소하는 쪽으로 나뉘는 것 같다. 냉소하는 쪽은 계속 냉소할 건가. 변화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쪽이다. 그런 점에서 절망적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4.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노명우:
- 지금 마흔아홉 살이다. 아마 벚꽃 필 때쯤 가장 감성에 젖지 않을까 싶다. 40대의 마지막 벚꽃놀이구나.
- 절망, 파국, 붕괴, 이런 단어가 그냥 말이 아니라 이제는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추상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의 엄중함이 느껴진다. 노스탤지어라든가 그런 말을 전에는 이론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체감한다. 이미 반환점을 넘긴 나이다. 백 살까지 살 거 아니면 이미 어느 샌가 넘어왔다. 그러니까 남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게 있다. 몇 가지 태도를 정했다.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20대는 리셋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방에 일변할 무언가. 그때 리셋 열망이 강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은 변화의 불가능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낭만적인 기대를 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궁극적 유토피아가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오면 뭐하겠나. 지금보다 더 나아진, 의미가 있는, 그런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이걸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려 한다.

류동민:
- 마르케스인가, "주변에 지나는 사람들이 다 나보다 어린 것을 발견했다"는 문장을 썼다. <러브 스토리> 영화에서 연인들보다 아버지 말에 이입된다. 사랑이 뭐라고, 그러다 헤어지면, 왜 그렇게 목숨을 걸어. 그게 맞다는 건 아닌데, 살아보니 그렇더라. 나이가 들었다.
- 전에 <변호인>과 <국제시장>을 봤다. 나야 <변호인>에는 감동할 만반의 준비를, <국제시장>은 딸 때문에 보면서 잔뜩 경계할 준비를 했다.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접점이 점점 사라지면서 더 미개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변호인>에도 왜곡이 있다. 주인공이 여공들에게 국어책 읽어주다가 잡혀가는데, 그 정도로 잡아갈 정도로 국가기관이 멍청하지 않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아도 분명히 잡아갈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왜곡을 보며 관객 절반은 감동할 테고 절반은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 사람은 기억, 경험이 쌓이는 것이다. 자기의 기억을 특권화해서 거기에 갇혀 산다. 남들은 틀렸고 자기 기억이 맞다고 믿는다. 바뀔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건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경험이 많이 쌓이면 더 완고해질 수는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입은 무겁게, 지갑은 가볍게라고 하던가. 나도 이야기하며 내 생각, 기억을 계속 특권화해서 강요하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마저도 자기는 안 변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계속 바뀌는 건데.

엄기호:
- '곱게 늙자'가 어릴 때부터 인생 모토였다. 늙었구나 하고 느낀 게 전경, 군인을 봤을 때다. 무섭다는 이미지도 있고 해서 나이가 많다고 느꼈는데, 이제 보니 아저씨가 아니라 애들이 서있더라.
- 나이가 드니 곱게 늙기가 쉬워 보였다. 마흔 넘어가니까 화를 내면 피곤하더라. 전처럼 화난다고 화내면 하루 자야 한다. 근데 곱게 늙는 걸 방해하는 게, 몸에 병이 난다.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날카로운 분이었는데, 아파서 내는 짜증이었구나 싶다. 작년에도 병원비 많이 냈다. 노년을 이해할 때, 사회나 정치 이런 게 아니라 몸의 문제를 봐야 한다. 병 나는 게 얼마나 사람을 좌우하는지 모른다. 이걸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떤 몸으로 살 것인지, 몸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 우리 사회는 병 권하는 사회다 보니 아프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아픈 건 삶의 문제다. 외국에서는 약 처방 잘 안 해준다. 아프다고 해도 약 안 주고 상태를 보자고 하고. 아프냐 안 아프냐가 아니라 얼마나 어떻게 아프냐도 봐야 한다.



5.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설문에 많은 분들이 답을 해주셨는데, 공통된 말들이 나왔다. 공감, 배려, 고려는 없는데 시선에는 민감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회다. 세 분의 책에도 공감, 연대, 공공, 이런 단어들이 나온다.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삶의 태도.

류동민:
- 남을 생각하는 사회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의 "공감" 개념이 있다. 그에 기반해 시장도 사회도 돌아가는 것이다. 연말정산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노했는가. 정부에서 바로 대책을 내놨다. 사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분노하게 만든 요인들이 있었다. 연봉 5500이면 중산층이라고, 7-8천이면 잘 산다고 자기들의 기준을 밝혔다. 그런데 연봉 5500인 사람이 4인가족 가장이고 혼자 벌며 서울에 산다고 가정하면, 벌어서 남는 게 없다. 평균은 저 앞에 앞서서 떨어져 있는데 나는 닿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회가 성장해도 무의미하다.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다.
- 실험실 쥐들. 좁은 곳에 부대끼면 스트레스 받고 공격적이 된다고. 한국, 서울도 그렇다. 좁은 공간에 짧은 시간만에 부대끼게 되었다. 여유 없다. 공감 못 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 그럼 이제 대안 이야기가 되는데, 대안은 없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해줘야 한다. 광주를 보자. 내 또래에는 광주에 가본 적 한 번도 없어도 말만 들어도 눈물 흘리던 이름이다. 30년이 지나니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 공감한다. 정치인들이 감정이입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말해줘야 한다. 정치인이 그러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한 것이겠고, 그럼 우리가 공감 문제에 말을 해야 한다. 가해자에 공감하지 말고.
이게 어느 정도 양적 변화가 쌓여야 질적 변화가 일어날 텐데. 나는 80년대에 군사 정부가 계속 갈 줄 알았다. 그래서 당시 저항하고 투쟁하던 사람들을 존경한다. 마르크스 한마디 더 끌어오면, 유토피아는 어디 그려진 이상향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계속 지양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해가면서 향하는 것이다.

엄기호:
- 배움의 기쁨이 중요하다. 날 지탱해주는 것이다. 이 망한 세상에 어떻게 살 것인가 했을 때, 남은 기쁨이다. 프란체스코 교황도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배움이 기쁘다는 건 선생이 가르쳐줄 수 없다. 자기가 깨우치는 것이다. 공부는 그걸 알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부는 기쁨의 주체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가다로 작동한다. 공부는 내가 아는 척하고 세상에 떠들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푸코가, 어느 그리스 정치인이 "너는 평생 폴리스를 돌보느라 널 돌보지 못했다"는 데 이야기하는 게 바로 배움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기쁨을 누가 가르쳐주지는 못해도 초대는 할 수 있다. 내가 왜 공부하는가, 그걸 전환할 필요가 있다. 듣는 것은 비판, 냉소, 까기, 조리돌림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들으면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폴리스도 돌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기쁨을 생각한다.

노명우:
- 사람의 위대함과 비루함이 같이 있는 것처럼, 삶도 살아낸다는 것과 살아지는 게 있지 않나. 내가 벗어 던지려는 태도가 몇 있는데, 아까 거 말고도, 과거 좋았던 시절을 미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재가 우울하다 보니 90년대를 마치 벨 에포크였던 것처럼 만들어내고 있는데, 누구에겐 7-80년대 끔찍했던 시대가 벨 에포크일 수도 있다. 좋았던 시절을 불러내는 데 익숙해지면 노스탤지어에 젖는다. 그런 사람의 진폭은 위험한 신호를 낼 수 있다. 이걸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과거를 떠올리기보다 지금을 보려 한다.
- 내가 변하는 속도와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다르다. 내가 변하는 게 제일 쉽다. 행위자가 많아질수록 변화는 힘들다. 세상 전체가, 인류가 변하는 건 개인의 변화에 비하면 불가능 수준이다. 그러나 인류의 변화가 불가능하다 보인다고 해서 내가 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내 주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변화가 있다. 한국사회가 통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변화가 의미가 없느냐. 전체 아니면 0이라고 한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통째로 변하는, 리셋을 생각하는 태도와도 거리를 두려 한다.
- 연대는 도덕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너무 거룩해서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희생해야 하니까. 이기적인 관점에서 출발해보자. 나는 자유롭고 싶다. 표현의 억압에서, 환경 오염에서, 구타에서 자유롭고 싶다. 개인들의 이런 이기심에서 출발하면 우리가 거룩한 위인이 되지 않더라도, 또 우리가 가진 사회의 여러 차원을 생각하면, 타인과 공통의 연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의 연대를 생각한다.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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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mazon.com/Rereadings-Seventeen-writers-revisit-books-ebook/dp/B0052Z3I0C/ref=tmm_kin_title_0?_encoding=UTF8&sr=8-3&qid=1417162071

* []는 저자 주, 괄호 안의 *는 역자 주

* 단행본은 『』, 개별 작품은 「」, 간행물이나 영화는 〈〉로 표시

* 시와 대사 번역은 임의로.

  

『Rereadings: Seventeen writers revisit books they love』 (Sep. 5, 2006) 중,

머리말: 다시 읽기에 대해

 

앤 패디먼

 

내 아들이 여덟 살일 때, 그 애에게 C. S. 루이스의 『말과 소년』을 읽어주었다. 나는 그 책을 여덟 살 때 처음 혼자서 읽었고, 그동안 '나니아 연대기'의 더 유명한 책들, 『사자와 마녀와 옷장』, 『마법사의 조카』, 『은 의자』 등은 다시 읽었지만 『말과 소년』을 읽은 지는 40년이 넘게 흘렀다.

좋아하는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것은 매우 즐거운 방식의 ‘다시 읽기’로, 아이가 당신만큼 책에 열정이 있을 경우, 당신의 문학적 취향과 부모로서의 자부심과 과거의 당신 자신 모두가 만족스럽게 입증된다. 헨리는 『말과 소년』에 푹 빠졌다. 『말과 소년』은 말할 줄 아는 두 말과 두 아이의 이야기로, 그들은 북쪽에 있는 왕국이 위험에 처하자 왕국의 몰락을 막으려고 장애물이 위협하는 사막을 뚫고 질주한다. 이건 나니아 연대기 중 가장 긴장감 넘치는 책이며, 헨리는 부모가 취침 시간을 반길 때 안타까워하고 그러면서도 곧 혼자 남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나이였기에 매일 밤마다 아직은 불을 끄지 말라고 내게 애원했다. 한 쪽만 더, 그리고 한 문단만 더, 그리고 또, 아이 참, 한 문장만 더는 안 돼요? 이 목가적인 풍경에는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나는 헨리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속으로 C. S. 루이스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인종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 돼지새끼라고 생각했다.

나는 루이스의 전기를 두 권 읽었고, 그가 여자들과 형성한 관계는 아홉 살 때 죽은 어머니를 포함해 꽤나 기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성 혐오가 담긴 오싹한 판타지 『황량한 땅(The Shoddy Lands)』에서는 화자(남자)가 여자 거인을 맞닥뜨릴 때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 구역질을 한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기로 『말과 소년』은 헨리 마거리트의 『신커티그 섬의 안개』처럼 그저 신나는 승마 모험담이고, 다만 신커티그처럼 ‘조랑말 수영 대회(Pony Penning Day)’를 여는 대신 칼싸움을 할 뿐이다. 하지만 루이스가 책의 여주인공 아라비스를 높게 인정한 이유를 깨달았을 때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남자애처럼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활과 화살과 말과 개와 수영’에 열을 올리고 옷도 남자애들처럼 입는다. ‘드레스와 파티와 뒷소문’에 열중하는,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소녀다운 소녀가 입는 옷과는 대조적이다. 루이스가 악당을 다루는 방식은 더 충격적이다. 악당들은 갈색 피부에 시미터를 휘두르며 ‘칼로르멘’이라고 불린다. (40년 전, 나는 대략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다른 단어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혹시 루이스가 기후를 염두한 것은 아닌지 잠깐 고민했으나 - 칼로르(calor)는 라틴어로 ‘열’을 뜻한다 -, 그럴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중국인 등장인물의 이름을 노랭이(*Mr. Yellow)라고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도적인 이름이다.) 책의 주인공 섀스타는 칼로르멘인 악덕 어부의 노예이지만, 방문객은 섀스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소년은 당신의 아들이 아닌 게 명백하군요. 당신의 볼은 나만큼 검지만 이 소년은 창백하고 하얗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가 남쪽의 상스러운 인종이 아니라 북쪽의 고귀한 인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칼로르멘의 수도는 뚱뚱하고 역겹고 탐욕스레 보석을 두른 티스록 황제가 다스리는 곳인데, 루이스는 그곳을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이 그곳에 간다면 알아차릴 것이라고는 안 씻은 사람들, 안 씻은 개들, 향수, 마늘, 양파, 곳곳에 놓인 쓰레기 더미에서 온통 피어오르는 냄새밖에 없으리라.”

이런 종류의 글을 헨리에게 읽어주면서 한마디 하지 않기는 어렵다. 어쨌건 그 단어는 내 목소리로 전달되니까. 나는 첫 백 장 정도까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소리치고 말았다. “너 『말과 소년』이 여자애들에게는 정말 불공평하게 군다는 거 알겠니? 그리고 나쁜 놈들은 모두 피부가 검다는 것도?”

헨리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니에요. 티스록은 나쁜 놈인데 C. S. 루이스는 그가 검다고는 안 했어요.”

“그래. 그는 칼로르멘이고 모든 칼로르멘들은 검어. 당연히.” 나는 내가 더듬기 시작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50년 전에 이 책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틀린 생각을 갖고 있었지. 남자애들은 여자애들보다 낫고, 혹은 백인은 흑인보다 낫고, 또…”

헨리는 내가 초콜릿 아이스크림 통에 식초 한 통을 떨어뜨렸다는 듯이 쏘아봤다. 누가 그 애를 탓하겠는가? 그 애는 책에 대한 분석, 비평, 평가, 설명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책을 이리저리 재보거나 딴죽을 걸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애는 내가 8살 때 원했던 바로 그것을 원했다. 섀스타와 아라비스가 제 시간에 아치랜드에 도착해 룬 왕에게 사악한 왕자 라바다시(*Rabadasy)가 이백 명의 칼로르멘 기사들을 끌고 왕성을 공격할 거라고 경고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엄마.” 그 애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냥 읽어주면 안 돼요?”

헨리와 내가 동시에 했던, 그냥 읽기와 다시 읽기의 핵심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전자는 더 빠르다. 후자는 더 깊다. 전자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책 안의 세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후자는 이야기를 가늠해보느라 책 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전자는 비교적 더 재미있고, 후자는 더 비판적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후자가 전자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이중 초점 렌즈의 상위 반쪽, 성인의 복잡한 시각으로 책을 보면서도 동시에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 그때는 책을 칼로르멘과 아치랜드를 가르는 ‘구부러진 화살’ 강처럼 빠르고 맑게 읽었다.

 

8년 전 문학 계간지 〈아메리칸 스칼러〉의 편집자가 되었을 때, 내가 처음에 결정해야 했던 문제는 도서 관련 지면을 꾸리는 방법이었다. 물론 우리는 신간에 대한 평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모든 진정한 독자에게는 아직 만나지 못한 책 외에 이미 친숙한 책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존중할 수 있을까? 시인 오스틴 돕슨이 1908년에 말했듯이, 새로운 책은 “우리 과거의 추억이나 생각과 별로 관련이 없다. 우리였던 것, 우리가 좋아하거나 좋아했던 것을 그 책들은 전혀 모른다. 하물며 우리가 그 책들을 모른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해결책은 매우 명백해서 나는 왜 모든 잡지가 이렇게 하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책을 읽었다는 글만이 아니라 오래된 책을 다시 읽은 글에도 도서 지면을 열어두었다.

그렇게 우리의 ‘다시 읽기’가 태어났다. 〈스칼러〉에서는 매번 특정한 사람이 스물다섯 살 이전에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받은 책을, 혹은 이야기나 시나 어떤 경우에는 음반 표지를 고르고, 그걸 서른이나 쉰이나 일흔에 다시 읽는다. 글쓴이가 사랑하는 대상은 유명하거나 혹은 무명일 수 있다. 추앙받는 고전이거나 인기를 끌었던 쓰레기일 수 있다. 어릴 때 읽은 동화거나, 첫사랑의 날카로운 아픔에 읽은 소설이거나, 경력 초기에 지침이 되었던 참고서일 수 있다.

‘다시 읽기’는 즉각 우리 잡지에서 제일 인기 있는 기획이 되었다. 이는 아마도 글쓴이들이 전통적인 문학 비평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관계에 대해서 썼다. 독자와 책 사이에 형성되는,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는 유대에 대해서였다. 열다섯 살에는 지혜의 샘처럼 보이던 책이 오십 살에는 찌꺼기만 남은 웅덩이로 보인다. 반면에 한때는 무의미하거나 불가해했던 구절이 삶의 경험을 통해 부스러기에서 황금으로 변한다. 다시 읽기가 거듭될수록 책에 관한 것뿐 아니라 독자들 자신의 모습도 드러났다. 각 글은 마음에 전류를 흐르게 한 주제, 솟아오르는 본연의 사랑에 대한 작은 회고록이다. 몇 십 년이 흐른다 해도 글쓴이 중 상당수가 책 표지의 원래 색깔, 그들이 앉았던 의자, 책을 읽었던 당시의 계절과 시간대를 기억하리라. 물론 그들은 기억했다. 당신도 첫사랑과 함께 누웠던 방, 침대가 놓인 방식, 시트의 색깔, 베개가 부드러웠는지 딱딱했는지 기억하지 않는가.

이 책(*『Rereadings』)은 내가 매우 좋아하는 열일곱 편의 다시 읽기를 실었다. 훌륭할 뿐만 아니라 제각각이라서 좋아하는 글이다. 글쓴이는 모두 미국인이지만 그들은 각기 다섯 국가에 살고, 그들이 쓴 책은 여덟 국가에서 나왔다. 그들의 관점, 문체, 그리고 유머 감각은 마치 발렌시아가 브랜드 드레스의 천 조각에서 찢어진 청바지의 천 조각까지 모아 바느질한 누비이불처럼 다양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 자꾸만 달아나는 목표물, 읽기의 본질을 쫓아간다. 이들을 같이 읽으면, 책장에서 책을 한 번만 뽑는 독자가 어째서 베토벤의 교향곡 공연에 한 번 가고 다시는 듣지 못하는 청취자처럼 불우한 사람인지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다시 읽기로는 견줄 사람이 없는 뛰어난 독서가인 홀브룩 잭슨에 따르면, 알렉산더 스코트 목사는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을 네 번 읽었다.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를 다섯 번 읽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알렉산더 포프가 번역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적어도 스무 번은 읽었다. 1928년 런던의 〈타임즈〉는 “‘에즈먼드’(*새커리의 『헨리 에즈먼드』)를 스물다섯 번은 읽어야 가입할 자격이 생기는” 협회가 있다고 보도한다. 나는 새커리를 매우 훌륭히 여기는 관계로, 협회의 구성원들이 수확체감(*투입이 선을 넘으면 한계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을 겪었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처음 순간은, 특히 어릴 때였다면 더욱 되돌아오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로 아이들은 책을 부어넣는 그릇이라지만 나는 반대가 더 정확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책에 부어넣으며 각 그릇에 맞는 모습으로 변한다. “나는 톰 존스였어"(*헨리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 데이비드 카퍼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한 로드릭 랜덤(*스몰리트가 쓴 『로드릭 랜덤』)이었고, 한 쌍의 낡은 신발 모형 장식물로 무장했으며, “영국왕립해군의 아무개 선장, 야만인들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결사 항전하여 장렬히 전사하리라 다짐했다.” 우리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을 때 문학 속 정체성을 덮어써보는데, 처음에는 비현실적이다가 나중에는 점점 일상에 가까워진다. 난 몰 혹은 토드(*『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여섯 살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때는 크기나 인종 같은 자질구레한 사항에 구애되지 않았다. 여덟 살에도 성별은 여전히 장벽이 아니었다. 아라비스 혹은 섀스타? 열여섯 살, 도로테아 혹은 로자몬드(*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나는 이게 수많은 아이들이 픽션을 선호하고 수많은 어른들이 논픽션을 선호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딱딱하게 굳는다. 우리의 모습은 고정되고 더 이상 부어넣지 못하게 된다.

『톰 존스』는 윌리엄 해즐릿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시 읽기에 관한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에세이인 “오래된 책 다시 읽기”에서 해즐릿은 이렇게 쓴다.

그것은 2주에 한번 나오는 간행물인 쿡(*미국의 금융업자 제이 쿡(1821-1905)의 이름을 땀)의 문고판으로, 잘리고 윤색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내가 읽은 것이라고는 교과서와 지루한 기독교 역사서뿐이었다(레드클리프 여사의 『숲 속의 낭만』은 제외하고). 그러나 여기에는 전혀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입에서는 꿀 같이” 달았는데도 “배에서는 쓰게 되는”(*요한계시록 10:9) 것도 아니었다. 이 책은 내가 살던, 그리고 내가 살아야 했던 세계를 후려쳤다.

『톰 존스』가 영어 수업 과제물이 아니라 최고로 흥미진진한 도피용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근사한지! 해즐릿이 언급한 판본은 6펜스짜리였고 연재물로 나와서 그를 그야말로 “문장 중간에, 이야기 틈에, 톰 존스가 장막 뒤에서 광장을 발견한 장소에” 매달려 있게 두었다. 그게 책이 처음 출판된 지 사십삼 년 후인 1792년이었으니 해즐릿은 열네 살이었을 테고, 그 나이면 특정 종류의 똑똑함이나 상상력이 생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이 불행한 아이들은 친구들과 지내기보다 그의 서재 속 인물들과 더 어울리게 된다. 그는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다. 문학으로 인한 기쁨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강해진다. 해즐릿은 이를 완벽히 이해했다.

한 현자가(그리 현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말하기를, 만약 그가 쌓아온 경험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다시 젊어지는 것을 틀림없이 매우 즐길 거라고 했다. 발언의 심각성을 보아하니 이 멍청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젊음의 크나큰 이점은 경험의 무게를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짐을 젊음의 어깨 위에 태연히 얹을 텐데, 그런 짓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절대 늦지 않다. 아! ‘기독교도의 짐’ 같은 이런 혹을 등에서 내려놓는 일이, 그리고 자그맣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륙판[문고본]의 도움을 받아 “무지는 축복”이던 때로, 픽션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가 세상의 난장판(*raree-show)을 처음으로 엿보던 때로 옮겨가는 일이 얼마나 특별한 권리인지.

어린아이의 그 장점 때문에 문학 속 난장판은 종종 삶 자체보다 더욱 생기가 넘쳐 보인다. 아마도 이는 수많은 어린 독자들이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에 더 관심을 품는 이유일 것이다. 작품의 꾸며낸 부분을 생각하면, 혹은 제빵사가 치즈 데니쉬 빵을 찍어내듯 잘 팔리는 문장을 대량 생산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등장인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아이들은 이를 잘 알지만, 자꾸 의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저 없이 기독교도의 짐을(출처는 『천로역정』으로, 주인공인 기독교도는 등에 진 무거운 짐을 버리지 않는다) 짊어질 것이다.

 

이른 나이에 책에 취해 황홀해지는 경우의 문제는 후에 다시 읽기가 실망스럽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날카롭고 감미로운 맛, 순수한 향기는 날아가고 말았다.” 해즐릿은 이렇게 쓴다. “그리고 문학의 줄기, 기울, 쭉정이만이 남는다.” 무서운 말이지만 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점점 더 마음이 움직이기가, 공포에 질리고 놀라고 자극받고 신경이 곤두서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당신의 교양은 심문실의 눈부신 전등이 되어 어느 불운한 책의 모든 사마귀와 흉터를 드러내고 숨겨둔 잘못을 털어놓게 할 것이다. “내 등장인물들은 목석이야! 내 이야기 구조는 삐걱거려! 나는 반쯤 페미니스트고, 반쯤 해체주의자고, 반쯤 포스트식민주의자야!” 등등. (영어 수업의 긍정적인 면은 우리에게 비평의 도구를 쥐어준다는 점인데, 그 상당수는 유용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그 도구들 때문에 당신의 책에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붓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바로 그 조건들 말이다.) 당신은 다른 책을 너무 많이 읽고, 그 각각의 점수를 낮게 매기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읽기란 환멸, 낙심, 상실의 경험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물론 아니다. 때때로 책이 훌륭해서 친근함이 흐려지기는커녕 깊어질 때도 있다. 그것은 앵무조개의 껍질처럼 (*피보나치 수열을 그리며) 늘어나고, 당신이 자랄수록 같이 자라난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야, 『전쟁과 평화』는 두 번째 읽으니까 좀 짧더라.” 혹은 단순히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책이 너무 어려워서 힘들었을 수 있다. 내가 처음 읽은 셰익스피어 희곡은 열두 살 때 본 「한여름밤의 꿈」이었는데, 나는 주어와 동사의 위치를 찾아내느라 녹초가 되었고 플롯이나 인물처럼 세부사항을 들여다볼 여력이 없었다. 혹은 처음 시도에서는 당신이 그 책을 잘못 받아들였을 수 있다. 열세 살 때 로버트 브라우닝의 「내 전처 공작부인」을 읽었을 때는, 나는 화자가 자기 아내를 죽였는지 몰랐다. 그건 시의 전체 요점이지만 마치 투명 잉크 같아서 오로지 다시 읽기에서만 알아볼 수 있었다. 혹은 어쩌면 그 책이 당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것, 다시 말해 사랑, 부모의 마음, 소명 등에 대한 것이라 힘들었을 수 있다. 당신이 그걸 15년 후에 다시 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리창에 코를 들이미는 것밖에 없다.

다시 읽기의 강력한 동기 하나는 순전한 자기만족이다. 그건 당신이 한때 좋아했던 것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래된 문고본, 이미 한참 전에 당신에게는 걸맞지 않게 된 손글씨로 여백에 적어둔 주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책을 열면,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연 것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뛰어오른다. 해즐릿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책 기억은 “우리가 윤리적 상상의 옷가지를, 우리의 가장 소중했던 애정의 유품을, 우리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의 증표와 기록을 원하는 대로 걸어두거나 꺼내보는 못걸이며 고리다.” 혹은 우리가 불행했던 때도 그렇다. 다시 읽기는 당신을 과거의 성실한, 불안한, 가식적인, 당황스러운 당신 자신, 당신이 예전에 벗어두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내내 당신 안에서 함께 살아왔다고 밝혀진 자신과 함께 밀실공포증을 유발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어릴 때 읽은 책이 연인이라면, 나중에 다시 읽으면 그 책은 친구가 된다. “친구 중의 친구”, 빅토리아 시대 예술가 윌리엄 제임스 린턴은 이렇게 썼다. “그것은 사이가 멀어지거나 공격할 수 없으니 / 무시당하더라도, 멋대로 돌아온다 / 오래된 우정과 함께”. 강등시키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결국 그건 오래된 친구이지 연인이 아니며, 안정이 필요할 때 당신이 가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다. 피로, 우울함, 아픔은 친숙함을 요하지 참신함을 찾지 않는다. 독감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을 때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이봐, 나는 아프간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어! 강황이 잔뜩 뿌려진 걸로 배달시켜 보자!” 당신은 치킨 수프를 갈망한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은 익히 알고 있는 책을 갈망한다. 아마도 약간 유치한 책이 편안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일을 지지해줄 것이다. 책장에서 『제인 에어』를 꺼내라. 제인은 완벽한 손님이다. 그녀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훌륭하고, 그녀와의 대화는 부담스럽지 않으며, 행복한 결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당신의 회복을 위한 모범이 된다.

그러나 취약한 시기에 다시 읽을 글이 언제나 간단하고 발랄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메리칸 스칼러〉에서 출간을 맡았던 알프레드 카진은 죽기 네 달 전 내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끝맺었다.

어제, 광포하고 싸늘한 폭풍우와 싸우는 것처럼 나의 팔십이 년 묵은 몸뚱이와 고투하느라 상심하여, 나는 결국 집에 돌아가 하디의 시를 집어 들고 읽으며 홀로 기력을 회복했는데, 이는 사람을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체계로 회귀하도록 하는 그의 재능 덕분이다. 거짓된 낙천주의는 없고, 그는 다만 유려한 발음의 단어들로 진실을 대비할 뿐이었다.

하디? 그런 상황에서라면 나는 아마 더 쾌활한 동료를 골랐을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보다는 말이다. “우리는 늙었다. / 이런 젊음은 짓누른다. 우리는 궤멸을 느낀다. / 보조적인 보금자리로 긴급히, / 저녁의 어둠은 퍼져 가니, / 신사 분들!” 그러나 나는 카진이 원했던 친구가 바로 하디였으리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짧게 언급했던 헨리와 나의 말싸움 뒤에도 『말과 소년』을 읽느라 몇 주가 지났다. 책의 일부는 매우 아름다웠다. 섀스타가 고대 왕들의 무덤에서 밤을 보내는 장면, 다치고 지친 아라비스가 남쪽 국경에 사는 현자의 돌집에서 헤더 침대에 누워 지낸 날, 나는 그 현자가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거대한 싸움을 중계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룬 왕과 칼로르멘 군대 아즈루는 가까이에서 치고받으며 싸웠지. 왕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왕은 그 상태를 잘 유지했고, 이겼지. 아즈루는 쓰러졌어. 에드문드 왕도 쓰러졌고. 아니, 다시 일어났지. 그는 라바다시 왕자가 가져온…” 어떻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어도, 나는 섀스타가 어릴 때 유괴되었던 왕자라고 밝혀지는 장면을 음미한다. 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해소되는 곳에, 여성혐오보다는 참신한 반낭만주의로 보이는 장면에 매료된다. “아라비스는 또 [섀스타와] 수많은 말싸움을 벌였지만(긴장된다, 심지어 수많은 싸움이다), 그들은 언제나 다시 화해하곤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뒤에도 싸우고 다시 화해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결국 둘은 결혼하여 이후로도 더 빈번하게 싸움을 벌였다.”

C. S. 루이스는 여전히 여자아이들과 칼로르멘을 열등하게 다루지만, 나는 이를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은 그가 편협하다는 논리가 책에서 얻는 기쁨과 힘겨운 씨름을 벌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넘길 쯤에는, 헨리가 약간씩 부추기기도 해서,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기쁨 쪽이 명백한 우위에 있음을 알았다. 책에는 심각한 결점들이 있지만 우리 관계는 잘라내기에는 너무 강하다.

그리고 왜 꼭 잘라내야 하나?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에서 시작하지만 우리는 이내 그들이 불륜을 저지르거나 술을 퍼마시거나 혹은 탈세를 저지르거나 어쩌면 무대 위에서 어색해 보이거나 이야기할 때 너무 오래 말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길 그만두던가?


Posted by 라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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